좋은 지식 생산하려면 ‘젠더 혁신’ 필요
좋은 지식 생산하려면 ‘젠더 혁신’ 필요
  • 엄수아 / 여성신문 기자
  • 승인 2014.11.28 16:53
  • 수정 2018-01-23 11: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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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 모두에게 필요”
“과학에 편견 없애야 지식 발전”

 

백희영(오른쪽)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과 론다 쉬빙어 스탠퍼드 대학 교수는 11월 26일 서울 정동에서 만남을 갖고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별 편향성이 없는 환경이라고 강조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백희영(오른쪽)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과 론다 쉬빙어 스탠퍼드 대학 교수는 11월 26일 서울 정동에서 만남을 갖고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별 편향성이 없는 환경이라고 강조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오랫동안 성별은 과학계에서 주요 변수가 아니었다. 성별 고려 없이 수조원을 들여 임상실험을 마친 의약품이 여성에게만 부작용이 생기기 전까지는 말이다. 회수 조치해 다시 판매하기까지 더 많은 비용은 물론 혼란이 컸다. 이 같은 과학계의 젠더 불균형을 바로잡고 ‘젠더 혁신’을 이루기 위해 두 여성이 만났다. 백희영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이하 여성과총) 회장과 론다 쉬빙어(Londa Schiebinger) 미국 스탠퍼드 대학 교수의 만남은 11월 26일 여성과총과 질병관리본부가 주관한 국회 토론회에 이어 서울 정동에서 이뤄졌다.

역사를 전공한 쉬빙어 교수는 과학 발전, 지식 생산 과정을 연구하면서 과학·기술·의료 분야에서의 ‘젠더혁신(GI·Gendered Innovation)’이란 개념을 만들었다. 생물학적·문화적 성을 모두 고려해 연구에 돌입해야 젠더 편견을 극복하고 좋은 지식을 생산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연구팀은 젠더혁신을 위해 12가지 방법을 개발하고 23가지 사례 연구를 통해 구체적인 연구 방향을 제안했다. 줄기세포, 자동차 충돌 테스트 장치, 골다공증, 노인 보조장치 공학 등 다양한 분야다.

특히 이 연구로 남성들은 심장병에 많이 걸리고, 여성들은 골다공증에 쉽게 걸린다는 사실이 틀렸음이 증명됐다. 실제 심장병은 여성 사망률이 가장 높은 병이었고, 남성들도 골다공증에 취약했다. 모두 의료연구 초기 편향된 기준으로만 연구가 이뤄져 심장병에 여성이 얼마나 취약한지가 제대로 연구되지 못했고, 골밀도 측정 기준도 잘못 세웠다.

백희영 회장은 “젠더 혁신은 남녀 모두에게 필요하다는 게 포인트”라며 “대부분 젠더가 들어가면 여성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과학기술 의료의 젠더 혁신은 남녀 모두를 고려한 것”이라고 말했다.

 

론다 쉬빙어 미국 스탠퍼드 대학 교수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론다 쉬빙어 미국 스탠퍼드 대학 교수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쉬빙어 교수는 “남성 연구자들이 지배해 온 연구들이 남녀 모두에게 무조건 맞는 건 아니다”라며 “미국에서 개발·연구비로 수백만 달러를 투입한 약이 부작용이 있어 회수해 보니 10개 중 8개가 여성에게 치명적이었다”고 말했다.

성인지적 관점이 중요한 이유는 연구 편향을 제거해 결과적으로 오류를 피하는 데 있다. 쉬빙어 교수는 “과학 연구에선 편견을 제거하는 게 중요하다. 성·젠더 분석은 연구의 정확도와 응용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사용되는 여러 연구 방법 중 하나”라고 말했다. 미국에서도 여성 건강에 대한 관심이 1990년부터 있었지만 주로 남성 연구자 풀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지식이 편향돼 있었다고 했다.

모든 연구 비용이 올라갈 텐데 초기 저항은 없었느냐고 묻자 쉬빙어 교수는 “연구를 잘못하는 것이 오히려 더 큰 낭비”라며 “몇 조원을 들였지만 결국 사람이 죽어 회수해야 한다면 그 비용이 엄청나다. 오히려 초기에 젠더 편향 없이 연구하는 게 효과적”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사실 이런 문제제기를 많이 받았던 듯 비용 문제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했다. “남성들만 대상으로 연구하면 그 자료가 더 쓸모 있어지나. 여성도 같이 연구하자고 하면 연구 비용 얘기를 하는데 얘기할 가치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무엇을 우선순위에 두느냐의 문제라고 했다. 최근에는 젠더 혁신을 한 연구가 더 효율적이고 비용이 절감된다는 것을 연구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사실 이러한 논의는 미국에서도 최근에야 진척됐다. 2005년 스탠퍼드대에서 ‘젠더 혁신’이 시작됐고 2011년 1월 유럽 연구자들과 함께 2년 단위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2012년에는 미국과학재단(NSF)도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 결과 국립보건원(NIH)이 올해 10월부터는 동물과 조직을 사용하는 모든 실험에서 성별분석을 실시해야 연구비가 나가도록 정했다.

 

백희영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백희영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우리나라는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인다. 2002년 여성 과학기술인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라 여성 연구자 육성을 지원하고 있으나 무엇보다 여성 연구자 비율이 너무 적다. 백 회장은 “특히 여성 연구자 중 비정규직 여성 비중이 크다. 한국에서 이공계 대학 진학을 독려하고 전공 분야로 취업 확대를 위한 정책, 여성 과학기술인 지원 및 육성을 위한 사업들이 있지만 효과는 크지 않다”고 말했다.

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WISET), 한국과학기술평가원(KISTEP)이 지난 6월 젠더 혁신 포럼을 개최하면서 조금씩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내년에는 젠더 서밋(summit)을 한국에서 개최할 예정이라 한국 여성 과학계는 기대가 크다.

백 회장은 “지식 생산 자체에 여성 참여가 중요하다는 인식이 있으면 자연히 여성 연구자도 늘어난다”며 “지금은 자리를 놓고 싸우는 것처럼 되는데 과학 발전에 있어 여성 참여가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라 자연히 여성들의 활동 영역도 넓어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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