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거의 매일 신문 사회면에 보도되는 사건 중 하나가 성희롱 사건이다. 학교, 군대, 민간기업, 공공기관, 정부, 심지어는 지하철, 해수욕장, 골프장까지 장소 불문이다. 현직 사단장도 구속되는가 하면 자살로 끝난 비극적 사건도 있었다. 사건들이 너무 많아서 일일이 나열하기조차 어렵다. 

돌이켜보면 정부가 성희롱 문제에 대해 발 벗고 나선 것은 ‘우 조교 성희롱 사건’이 계기가 됐다. 1993년 서울대에서 근무하던 우모 조교가 담당교수였던 신모 교수에게 성희롱을 당했다고 고발한 사건이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제기된 성희롱 관련 소송이어서 관심이 매우 뜨거웠다. 6년간의 긴 법정투쟁이 이어졌고, 결국 가해자가 피해 조교에게 500만원을 지급하라는 판결로 일단락됐다. 이 사건 이전에는 성희롱을 아무도 심각한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다. 

‘성희롱’이라는 용어는 1995년 12월 30일 제정된 ‘여성발전기본법’에 처음 등장했다. 동법 제17조에 “국가·지방자치단체 또는 사업주는 성희롱의 예방 등 직장 내의 평등한 근무환경 조성을 위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하여야 한다”라고 규정한 것이 처음이다. 성희롱의 구체적인 개념은 1999년 ‘남녀차별금지및구제에관한법률’(이하 남녀차별금지법)에서 정립된다. 성희롱이라 함은 업무, 고용 기타 관계에서 공공기관의 종사자, 사용자 또는 근로자가 그 지위를 이용하거나 업무 등과 관련해 성적 언동 등으로 성적 굴욕감 또는 혐오감을 느끼게 하거나, 성적 언동 기타 요구 등에 대한 불응을 이유로 고용상의 불이익을 주는 것을 말한다. 

남녀차별금지법에 근거해서 1999년 7월부터 여성부 남녀차별개선위원회에서 성희롱 사건을 접수하기 시작했다. 남녀고용평등법도 비슷한 시기에 개정되어 지방노동관청에서도 함께 신고를 받았다. 직장 내 성희롱이 남녀차별이라는 것은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어서 1999년 남녀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서 성희롱 방지 정책이 국가 차원에서 시작됐다. 

남녀차별금지법 제정은 성희롱에 대한 기존 인식을 바꾼 계기가 됐다. 당시 여성업무를 담당했던 여성가족부의 전신인 여성특별위원회의 중요한 정책적 결실이었다.

DJ정부가 들어서면서 정무장관 제2실이 폐지되고 여성정책의 조정기능을 활성화하기 위해 대통령 직속 특별위원회가 신설됐다. 이와 동시에 복지부, 교육부, 법무부 등 5개 부처에 여성정책담당관제도가 만들어졌다. 위원회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컸지만, 그것은 환상이었다. 업무를 시작하면서 그 환상은 금방 깨졌다. 

여성정책 조정 기능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국무회의 보고 등을 통해 각 부처와의 협력을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나, 위원장은 국무회의에 참석 멤버가 아니어서 참석은 고사하고 무엇이 논의되는지 알기도 어려웠다. 나중에 위원장은 국무회의, 사무처장은 차관회의 배석자가 됐으나 그 과정도 오래 걸렸다. 이러한 한계는 여성부 탄생의 원동력이 됐다. 

남녀차별금지법 하면 떠오르는 분이 윤후정 여성특별위원회 초대 위원장이다. 이화여대 총장을 지낸 윤 위원장은 성희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여성특위가 준사법권을 갖고 직접 구제업무를 해야 한다고 보고 남녀차별금지법 제정을 추진했다. 하지만 남녀차별금지법 제정을 두고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남녀차별금지법을 제정하기 위해 사회 원로이자 장관급 위원장으로서의 체면도 버리고 다른 부처와 국회를 직접 발로 찾아다니며 설득한 윤 위원장의 노력과 추진력이 없었다면 법제정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모든 변화가 불과 15년 전에 시작이 된 것이다. 당시 성희롱에 대한 기준을 만들 때 어디까지가 성희롱이냐 하는 기준에 대한 많은 논의를 했다. 성희롱의 기준은 보통 사람이 상식적인 수준에서 느끼는 불쾌감이나 굴욕감이다. 그러나 한동안 ‘음란한 눈빛’도 성희롱이 되냐고 묻는 분들이 많았다. 음란한 눈빛을 판단할 객관적인 기준이 없다는 점에서 눈빛은 처음부터 제외됐다. 모든 것이 처음 시작되니 논란도 있었지만 국가가 나서서 성희롱 사건을 신고받기 시작한 것은 양성평등 문화로 나아가는 사회변화의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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