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장 가듯, 분위기 스스로 즐겨야
개성 살린 연주, 국제무대에서 주목
테크닉보다는 감성, 표현력 길러야

 

열한 살 때 국립교향악단과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협연하고, 이후 국내의 유명 콩쿠르를 휩쓸었다. 줄리아드 음악학교 유학 이후엔 로베르 카자드쥐 국제 콩쿠르에서 1위를 하며 국제적으로 주목받았던 뛰어난 피아니스트. 손열음·김선욱·문지영 등 순수 국내파 연주자를 유명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으로 이끌었던 스승인 김대진(52) 교수의 첫인상은 부드러움과 성실함으로 전해졌다.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포디움 위에서 보였던 카리스마 넘치는 지휘자의 중후함보다는 교향곡의 주제음악이 악기를 옮겨가며 어떻게 변주되고 있는지 깊이 있게 해설해주던 ‘자상한 선생님’이었다. 연주자, 지휘자, 영재발굴과 교육자 등 음악인으로 1인 5역을 해내고 있는 그를 10일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구실에서 만났다.

오전에 수원에서 수원시립교향악단과 연습을 하고, 점심은 차 안에서 김밥으로 해결한다니 뜻밖이었다. 운전할 때는 음악도 듣지 않고 오로지 운전에만 몰두한다는 그다.

“요즘 학생들은 음악 들으면서 공부도 하더군요. 그런데 저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못 해요.”

위트 넘치는 달변가던 ‘해설하는 지휘자’의 또 다른 면이 보였다.

9월엔 수원시향 정기연주회, 금호 체임버뮤직 소사이어티 연주회, 예술의전당 토요음악회 등 세 차례 연주회 외에 이탈리아 메라노 국제 음악 페스티벌에 참가, 지휘와 함께 피아노 협연도 했다. 10월 역시 두 차례 연주회가 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연습은 물론 학생들 지도에다, 이 달엔 한예종의 1,2차 수시입시까지 있어 스케줄이 여간 빡빡한 게 아니다. 그런데도 그의 표정에선 피곤함이나 불편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온음표에서 32분음표까지, 또 점음표까지 더해 시간을 쪼개 쓸 수 있는 수학적 능력과 ‘열정’이 만들어 준 일상인가 보다.

연주는 자기 자신을 보여주는 것

-영재교육에 특별히 관심을 많이 쏟고 계신데, 연주자가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덕목이 있는지요.

“연주는 자기 자신을 보여주는 겁니다. 작곡가가 원하는 느낌에 자기 감정을 넣어야 합니다. 단순히 곡을 익히고 테크닉을 익히는 것으로 끝나지 않아요. 독창성이 중요합니다. 끼가 있는지를 봅니다.”

한예종 교수로 부임한 지 20년째인 김 교수는 그간의 경험으로 한 사람의 연주자를 길러내는 데는 “음악을 자연스럽게 즐기는 집안 분위기와 부모님의 음악 자체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교육과정에선 무관심하되, 지도자와 소통이 필요하며 아이의 연습을 지켜보며 감수성을 길러주고 표현력을 키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최상이란다. 손열음의 경우, 레슨 후에는 어머니가 배운 것을 글로 표현하는 훈련을 하게 했단다.

- 음악인으로서 가장 보람되게 생각하는 역할은 무엇인지요.

“가르치는 일입니다. 즐거움과 보람을 느낍니다. 부임해서 초기엔 학생들을 호통치며, 무섭게 가르쳤지요. 그 덕에 실기시험이나 콩쿠르에서 두각을 드러내 ‘최고의 피아니스트를 길러낸 명교수’로 인정받고, 부담스러울 만큼의 명예도 얻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김 교수는 달라졌다. “리즈 콩쿠르 심사를 하면서 외국 참가자들은 테크닉에선 다소 미흡해도, 피아노와 함께 즐기는 모습을 보이고 심사위원들도 함께 즐기며 편안해하는 반면, 한국 참가자들은 ‘실수하지 않겠다’ ‘잘 치겠다’는 집념이 너무 강해 듣는 이들까지도 긴장하고 마음을 무겁게 한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축구선수들에게 있어 축구공이 친구이듯 피아노를 배우는 학생들도 피아노를 극복할 대상이 아닌, 친구처럼 가깝고 편안한 존재가 되게 해야겠다는 생각에 스스로 반성하고 변하려고 애를 썼어요.”

-지도자로서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부분은 무엇인지.

“10여 년 전 해외 콩쿠르에서 우리 학생들은 기능적인 면에서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우수성을 드러내 각국의 심사위원들을 놀라게 했고, 좋은 성적도 거둘 수 있었어요. 하지만 최근 한국 학생들은 ‘어떻게 저렇게’ 하고 경탄은 하지만 뭔가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고 전한다. 다른 학생들과 똑같지 않은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어야 좋은 연주자란다.

자기만의 해석, 감정이 묻어나는 연주가 될 수 있는 지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우리 사회는 하나의 정답을 원해왔던 것 같아요. 다른 사람과 다르면 불편해하지요. 모두들 같은 모습으로 같은 문을 통과하기를 원합니다. 대학입시가 좀 더 세련되게 바뀌기를 바랍니다. 김연아, 박태환 같은 선수들이 나온 우리나라 수준에 걸맞은 제도와 교육으로, 학생들이 후퇴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제자들의 연주회에 가서, 연습 때의 기량이 제대로 나오는지 살피고, ‘오리지널리티’가 있는지 확인하는 것도 스승으로서만 맛볼 수 있는 기쁨이란다.

 

눈물 없이 만들어지는 것은 없다

-지휘자로서 느끼는 보람도 크지 않나요.

“청소년음악회를 열면서 우연하게 지휘자의 길에 들어서게 됐습니다. 연주자와 지휘자의 관계는 운동선수와 코치의 관계와 같아요. 악기에 대한 간접 표현이지요. 단원들과 소통·공감할 수 있는 절대적 시간 경험이 있어야 하고요. 7년 동안 수원시향의 발전을 목표로 정해 접근해 왔습니다. 해외 유수의 오케스트라처럼 ‘큰 그릇’은 아니더라도 우리 그릇에 넘치도록 연습하고 열정을 담은 연주를 하자고 독려해 성과를 올리고 있습니다.”

올해 이탈리아 메라노 국제 음악 페스티벌에 정당한 대우를 받으며 초청받은 것이 한 예다.

‘대중의 클래식화’ ‘클래식의 대중화’를 위해 매달 셋째 토요일에 가지는 토요 음악회에서 지휘자인 김 교수가 하는 해설은 여느 해설자의 그것과는 다르다. 클래식 음악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심화된 음악회다. 주 멜로디의 변주 과정을 통해 곡의 얼개를 보여준다. 그의 설명을 하나하나 따라가다 보면 위대한 건축물의 숨은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 같다.

-음악을 연주하고 지휘하면서 스트레스는 느끼시는지.

“눈물 없이 만들어지는 것은 없지요. 창조를 위해 즐겁게 받아들이고 때로 힘들더라도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정히 힘들면 작곡가를 생각하지요. 영감을 받아 한순간에 나온 위대한 작품은 없어요. 그분들은 더한 고민과 방황, 고통 속에 작곡했다고 생각하면 위안이 됩니다.”

-음악회에서 아마추어가 음악을 듣는 방법이 있나요.

“청중은 작곡가, 연주자와 함께 음악회의 중요 구성원입니다. 선수의 기량만 보려고 경기장에 가지 않듯 자유롭고 즐거운 분위기를 즐기듯 연주회의 분위기를 함께 느끼고 공감하면 됩니다. 듣고 평가하기보다는 음악을 편안하게 즐기세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신년 음악회를 들으며 감동하는 청중의 모습은 영상만으로도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유럽에선 작은 동네 오케스트라의 연주회에서도 청중이 즐거워하고 감동의 박수를 보냅니다.”

-좋아하고 닮고 싶은 피아노 연주가는.

“외롭지만 한결같은 모습으로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백건우 선생을 존경합니다. 끊임없는 연습을 통해서 순순한 열정의 독보적인 음악세계를 열어가는 구도자라 할 수 있어요.”

큰딸 화라양이 올해 줄리아드 음악학교 대학원을 졸업, 뒷바라지하던 아내와의 기러기 생활도 마침표를 찍었다. 국내에서 영재교육을 하고 있지만 김 교수는 바이올린을 전공하는 아이가 ‘누구의 딸’이라는 것 때문에 불편해하지 않기 위해 일찍이 유학을 허락했다고.

한 시간 여의 인터뷰를 마치며 기자는 이 시대 뛰어난 음악 스타에게서 감성과 이성이 조화를 이루고 부드러우면서도 스스로 정한 규칙을 철저히 지키는 ‘외유내강’ 참스승의 기운을 받고 나왔다.

 

김대진 교수는 

△서울예고, 미국 줄리아드 음악학교 및 대학원 졸업(박사) △1979년 동아 음악콩쿠르 대상, 85년 로베르 카자드쥐 국제 콩쿠르(현 클리블랜드 국제콩쿠르) 1위, 85년 난파음악상, 2004년 금호 음악스승상, 2005년 문화관광부 올해의 예술상 음악부문 수상 △퀸엘리자베스 국제 콩쿠르, 리즈 국제피아노 콩쿠르, 베토벤 국제 콩쿠르, 하마마츠 국제 피아노 콩쿠르, 루빈스타인 국제 콩쿠르 등 세계 유명 콩쿠르 심사위원 참여 △2013년 제1회 대한민국 청소년 국제 피아노 콩쿠르 창설, 운영위원장 및 심사위원장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 한국예술영재교육연구원 원장, 한국예술영재교원 원장, 수원시립교향악단 음악감독 및 상임지휘자. 금호아트홀 체임버뮤직 소사이어티 음악감독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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