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돌풍을 일으킨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에 대한 나의 느낌은 그리 개운한 감동이 아니었다. 그저 그런 소설 중 하나로 치부하면 가벼이 넘길 수도 있었으나, 해외진출까지 성공하며 문단과 언론의 호평 다소 지나치다 싶었다.

대중예술 연구자인 나에게, 그 소설은 딱 한 가지를 빼놓고서는 지나치게 낯익은 구도의 작품이었다. 그 ‘딱 한 가지’란, 소설의 서술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 2인칭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보통 ‘나의 어머니는’ 혹은 ‘그의 어머니는’이라는 식으로 1인칭이나 3인칭의 서술을 하는 것이 소설의 관행인데, 이 소설은 독특하게 ‘너의 어머니는’이라고 쓰고 있는 지점이었다. 작품 속 주인공으로 설정된 어머니가, 독자가 알지 못하는 어느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독자(바로 ‘너’)의 어머니라고 들이대는 설정이 주는 충격이 신선했다.

 

그러나 그것만 빼면 이 소설은 다소 맥 빠지는 대중예술의 익숙한 구도를 반복하고 있었다. ‘불쌍하고 헌신적인 어머니의 죽음’과 ‘자식의 죄책감’이라는 구도. 너무도 낯익고 상투적이지 않는가. 엄마 이야기에 눈물콧물 흘리는 설정, 그것도 평생 가난한 엄마, 못 배워서 어디 가서 큰소리 한번 제대로 쳐보지 못한 엄마, 그런 불쌍한 엄마가 한평생 자식만 위해서 살았는데, 다 큰 자식들의 무관심 속에 실종되어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고 자식들은 죄책감에 눈물 흘린다니, 대중예술에서는 너무도 흔한 이야기 아닌가. 

우리나라 대중가요에서도 오랫동안 엄마는 죄책감과 눈물, 통곡 같은 것과 결부되어 나타났다. 21세기인 지금도 사람들은 엄마 이야기를 진지하게 하려면 눈물부터 보이기 일쑤인데, 신파적 감수성이 지배적이던 20세기 초중반까지는 오죽했으랴. 일제 말에 발표되어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진방남의 ‘불효자는 웁니다’나, 1980년대에 나왔으나 역시 ‘어머니 아버지 그 어디에 계십니까 / 목 메이게 불러봅니다’ 식의 통곡으로 꺽꺽거리는 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년’ 같은 노래는, 아직도 가요무대를 비롯한 무대에서 인기 레퍼토리이다. 

 

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년
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년'

부모자식의 관계에는 서로 죄책감을 갖기 쉽다. 혈육이란 무한책임을 지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최선을 다했다 할지라도 늘 후회가 남는다. 그런데 바로 이런 죄책감을 자극하는 가장 손쉬운 장치가 바로 ‘죽음’이다. 완벽한 소멸인 죽음은, 삶의 논리 안에서는 비교할 그 무엇이 없다. 그 앞에서는 누구나 엄숙해지며 누구나 한없이 작아진다. 죽음의 강을 건너가는 엄마 앞에서 어느 자식이 후회와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작가는, 독자들을 무장해제시키는 너무 손쉽고 상투적인 장치를 쓰고 있는 것이다. 

엄마란 말에 눈물이 따라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꼭 죄책감이나 통곡으로만 표현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예컨대 이런 정도라면 충분히 자연스럽지 않을까. 드보르작 작곡의 ‘어머니가 가르치신 노래’의 한국어 가사인데, 고등학교 합창반 시절에 배웠던 기억을 되짚어 옮겨본다.

 

어머니 나에게 노래를 가르쳐주실 때에 / 그의 두 눈에서 눈물 흘리셨네 / 이제는 내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칠 때에 / 형언할 수 없는 눈물 내게서도 흘러내리네

엄마라는 소재는, 너무 쉽게 누선을 자극하는 소재인 까닭에 다소 조심스럽고 절제감 있게 쓸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만 그 강력한 소재 앞에 비판적 사고가 중단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자칫 ‘모성 이데올로기’에 빠져버릴 수 있는 것이다.

트로트 가요에서 흔히 등장했던 엄마에 대한 죄책감과 통곡의 과잉된 감정이 다소 절제되고 다소 정상적인 그리움과 사랑으로 내려앉은 것은, 1960년대를 거쳐 1970년대에 도달하면서부터였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 겨울에 기나긴 밤 어머님하고 / 둘이 앉아 / 옛이야기 들어라 /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 이 이야기 듣는가 /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 /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리라

                              유주용 <부모>(1968, 김소월 작시, 서영은 작곡)

  생명은 어떻게 만들어져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 오묘한 생명이 몸이라는 물질로 연결된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란 참으로 오묘한 인연이다. 이런 부모자식의 관계를 담담한 언어와 음악으로 그려낸 노래가 나오는 것은 1960년대이다. 그것도 김소월의 시에 기대어서 겨우겨우 도달한 것이다. 

 

GOD의 ‘어머님께’ 뮤직비디오 캡처
GOD의 ‘어머님께’ 뮤직비디오 캡처
 

그러나 이 시작은 아주 힘겨웠고, 신파적 죄책감은 아주 오랫동안 힘을 발휘했다. 20세기가 끝나는 시기에 하이틴 그룹인 GOD의 ‘어머님께’조차, 짜장면 한 그릇도 마음 놓고 먹지 못했던 불쌍한 엄마의 죽음과, 매일 말썽만 부렸던 죄 많은 자식의 구도를 반복하고 있으니 말이다. 창작자 박진영도, 역시 손쉬운 방법을 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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