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 여성인권선언문
여성의 교육권·직업권·참정권 주장

 

1898년 9월 8일자 황성신문에 게재된 ‘여권통문’. ⓒ국립여성사전시관
1898년 9월 8일자 황성신문에 게재된 ‘여권통문’. ⓒ국립여성사전시관

“혹시 신체와 수족과 이목이 남녀가 다름이 있는가. 어찌하여 병신 모양으로 사나이의 벌어주는 것만 먹고 평생을 심규에 처하여 그 절제만 받으리오.”

116년 전인 1898년 9월 1일 서울 북촌(현재 종로구)에 살던 이소사, 김소사가 낭독한 ‘여권통문(女權通文)’의 문장 중 일부다. 여권통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인권 선언문이다. 당시 여권통문을 발표한 여성 300여 명은 여성의 교육권·직업권·참정권을 주장, 여성의 사회진출과 권익 증진을 촉구하는 원동력이 됐다. 

여권통문 발표에 참여했던 여성들은 대부분 서울 북촌의 양반 여성들이었다. 그러나 여권통문 발표 이후 서민층 부녀와 기생들, 지방의 부인들도 동조해 9월 12일 최초의 근대적 여성단체인 ‘찬양회’를 조직했다. 

사단법인 역사·여성·미래, 한국여성사학회,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는 “이 여성들은 당시 독립협회 중심의 개화운동과 만민공동회에도 동참했으며, 관립 여학교 설립 운동을 전개했다”며 “비록 관립 여학교는 불발했지만 30명 정원의 초등학교 순성여학교를 설립·운영했고 이후 1905년 을사국권침탈 전까지 여학교 170여 개가 설립되는 성과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들은 북촌에 살던 여성들이 여권통문을 발표한 1898년 9월 1일을 “한국 여성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날”이라고 평가했다.

고양지방합동청사에 위치한 국립여성사전시관은 여권통문 발표일인 9월 1일 개관식을 열고,  ‘북촌에서 온 편지, 여권통문’을 주제로 한 특별기획전을 전시 중이다. 

다음은 1898년 9월 8일자 황성신문에 게재된 ‘여권통문’ 중 일부분이다. 

<여권통문>

물이 상하면 반드시 변하고, 병이 극하면 반드시 고치는 것이 고금의 이치다. (중략) 

이제 우리 이천 만 동포형제가 (중략) 구습을 영영 버리고 개명한 신식을 좇아 행하는데, 일신우일신함은 영영한 소아라도 저마다 아는 바거늘, 어찌하여 우리 여인들은 일향 귀 먹고 눈 어두운 병신 모양으로 옛날식 규방만 지키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혹시 신체와 수족과 이목이 남녀가 다름이 있는가. 어찌하여 병신 모양으로 사나이의 벌어주는 것만 먹고 평생을 심규에 처하여 그 절제만 받으리오. 

먼저 문명개화한 나라를 보면 남녀가 일반 사람이라. 

어려서부터 각각 학교에 다니며 제조를 다 배우고 이목을 넓혀 장성한 뒤에는 사나이와 부부지의를 정하여 평생을 사는데, 그 사나이한테 조금도 절제를 받지 아니하고, 도리어 극히 공경함을 받는다.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리오. 

슬프다! 전날을 생각하면 사나이의 위력으로 여편네를 누르고, 구설을 핑계로 여자는 안에 머물면서 밖의 일을 말하지 않고, 오로지 밥하고 옷 짓는 것만 하리오. 

어찌하여 신체와 수족과 이목이 남자와 다름없는 사람으로 규방에 갇혀 밥과 술만 지으리오.

우리도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따라 타국과 같이 여학교를 실시하고, 각각 여아들을 보내 재주를 배우고, 규칙과 행세하는 도리를 배워 남녀가 일반 사람이 되게 할 당장 여학교를 실시하오니 우리 동포 형제 여러 부녀 중 영웅 호걸님네들은 각각 분발한 마음을 내어 우리 학교 회원에 드시려거든 곧 칙명하시기를 바라옵나이다.

구월일일 여학교 설립 발기인 이소사, 김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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