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은 곧 정조 상실, 남성의 시선에 갇힌 고향 떠난 여성의 모습

 

고향 떠난 여자들의 모습은 여자의 시선이 아닌 이를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사진은 고향의 ‘옛 정취’를 떠올리게 하는 충남 부여 백제문화단지 생활문화마을 초가집 모습. ⓒ뉴시스·여성신문
고향 떠난 여자들의 모습은 여자의 시선이 아닌 이를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사진은 고향의 ‘옛 정취’를 떠올리게 하는 충남 부여 백제문화단지 생활문화마을 초가집 모습. ⓒ뉴시스·여성신문

고향 노래가 온통 남자들의 목소리뿐이지만, 현실 속 여자들이 고향을 떠나지 않았던 건 아니다. 여자라고 갑작스러운 근대화의 회오리바람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겠는가. 단, 고향 떠난 여자들의 모습은 여자의 시선이 아닌 이를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신고산이 우르르르 함흥 차 떠나는 소리에/ 구고산 큰애기 단봇짐만 싸누나/ 어랑 어랑 어허야 어야 디야 내 사랑아

‘신고산타령’ 일부(함경도 민요) 

‘신고산’은 산의 이름이 아니다. 일제가 경원선을 놓으면서 함경남도 고산 바로 옆에 기차역을 짓고 ‘신(新)고산’이라 이름 붙였다. 철도 때문에 의주 옆에 신의주가, 태인 옆에 신태인이 생긴 이치와 같다. 그에 따라 원조 고산은 ‘구(舊)고산’이 돼 버렸다. ‘우르르르’ 하는 기차 소리에, 구고산의 처녀(큰애기)는 함흥으로 튀고 싶어 부모 몰래 단봇짐(간단한 봇짐)을 싼다는 것이다. 도시로의 열망은 남녀 구분이 없지만, 그저 노래에선 여자들만 심히 우려했다. 

하지만 세상의 변화는 이를 가속화했다. 특히 전쟁과 분단으로 남녀 모두 고향을 떠나는 일이 급증했고, 혹은 황정자의 처녀 뱃사공 가사에서처럼, 집 떠난 남자 대신 누이동생이 뱃사공 노릇이라도 해야 먹고사는 세상이 됐다. 여자들이 고향 떠날 기회가 늘어났으니, 여자를 우려하는 노래도 늘었다. 

그날 밤 극장 앞에서 그 역전 캬바레에서/ 보았다는 그 소문이 들리는 순희/ 석유 불 등잔 밑에 밤을 새면서/ 실패 감던 순희가 다홍치마 순희가/ 이름조차 에레나로 달라진 순희 순희/ 오늘밤도 파티에서 춤을 추더냐

안다성 ‘에레나가 된 순희’ 1절(손로원 작사·한복남 작곡, 1954)

이 노래는, 고향의 ‘순희’와 대도시의 ‘양공주 에레나’의 극명한 대립, 여기에 에레나가 일하는 곳을 연상시키는 탱고 음악이 인상적이어서, 1980년대 초까지 대학생들의 민중가요로 구전됐다. 이 시절 ‘양공주’의 대부분은 다홍치마 입고 실패 감던 여염집 여자들이었고, 심지어 번듯한 집안에서 공부까지 제대로 한 여대생도 있었다. 

물론 전쟁만 요인이 된 건 아니었다. 미국식 근대성을 직수입한 1950년대 이후의 대한민국의 대도시는, 미국식 ‘자유’를 맛볼 수 있는 신천지로 여겨졌다.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 처녀 바람 났네/ 물동이 호매 자루 나도 몰라 내던지고/ 말만 들은 서울로 누굴 찾아서/ 이쁜이도 금순이도 단봇짐을 쌌다네

석유등잔 사랑방에 동네 총각 맥 풀렸네/ 올가을 풍년가에 장가들려 하였건만/ 신붓감이 서울로 도망갔대니/ 복돌이도 삼룡이도 단봇짐을 쌌다네 

서울이란 요술쟁이 찾아갈 곳 못 되더라/ 새빨간 그 입술에 웃음 파는 에레나야/ 헛고생을 말고서 고향에 가자/ 달래주는 복돌이에 이쁜이는 울었네

김정애 ‘앵두나무 처녀’1~3절(천봉 작사·한복남 작곡, 1956)

단봇짐을 싸서 상경한 ‘이쁜이’는 결국 ‘에레나’가 됐단다. ‘이향=정조 상실’이란 생각이 거의 공식처럼 굳어진 양상이다. 결국 우려는 여자의 고생살이가 아니라 이거였던가!  

그나마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재안착한 1960년대에는, 여자가 고향 떠나는 모습이 노래로 거의 나오지 않는다. 이 시기는 국가 주도의 산업화 드라이브로 여자들의 이농이 훨씬 심해지는 시대였는데도 말이다. 대중가요는 본질이 체제 순응적이며, 따라서 이 시대 대중가요는 그저 고향에서 기다리는 여자만 그릴 뿐이었다. 

내 이름은 경상도 울산 큰애기/ 상냥하고 복스런 울산 큰애기/ 서울 간 삼돌이가 편지를 보냈는데/ 서울에는 어여쁜 아가씨도 많지만/ 울산이라 큰애기 제일 좋더라/ 나도야 삼돌이가 제일 좋더라

김상희 ‘울산 큰애기’ 1절(탁소연 작사·나화랑 작곡, 1965)

나는 정말 귀향하여 ‘큰애기’와 결혼한 ‘삼돌이’가 얼마나 되는지 매우 궁금하다. 먹고살 것 없는 고향에 다시 내려갔을리는 만무하다. 대중가요에서 여자더러 ‘빨리 올라와서 결혼하자’고 노래한 것을 별로 본 적이 없다. 

남자들은 그저 고향의 처녀를 아름답고 흐뭇하게 노래할 뿐이다. 그것도 ‘어머니’처럼 절실한 그리움의 대상도 아니다. 고향의 처녀를 대하는 남자들의 태도는 그저 고향 풍경을 바라보듯 별다른 절실함이 없다. 1970년대 초 남진의 목화 아가씨는 이제는 목화 농사도 짓지 않는 시골 풍경 속에 고향 여자를 배치해 놓았다. 이런 시골 처녀와 결혼할 마음은 없는 것이다. 고향 떠난다면 걱정할 뿐, 그 이상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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