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이후의 해수욕장은 남녀의 육체적 접촉 가능성을 ‘상상’하는 공간으로 상정됐다. 사진은 지난 2011년 7월 울산 진하해수욕장 모래사장에 있는 다양한 남녀 모습. ⓒ뉴시스·여성신문
1970년대 이후의 해수욕장은 남녀의 육체적 접촉 가능성을 ‘상상’하는 공간으로 상정됐다. 사진은 지난 2011년 7월 울산 진하해수욕장 모래사장에 있는 다양한 남녀 모습. ⓒ뉴시스·여성신문

‘바다’와 ‘여자’라는 조합이 이제는 해수욕장의 수영복 차림의 여자를 연상시키지만, 사실 그 역사는 오래되지 않았다. 대중가요에서 바다를 배경으로 등장하는 여자는, 해수욕을 즐기는 여자가 아니었다. 바다는 피서의 장소라기보다는 이별의 장소였다. 1930년대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부터 1960년대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 1980년대 심수봉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같은 노래에 이르기까지 바다는 줄곧 이별의 장소로 등장했다. 20세기 전반기까지는 남자들에게도 바다는 해수욕보다는 좋은 경치에서 바닷바람을 쐬는 곳이었다고 보인다. 1950년대 말의 박경원의 ‘만리포 사랑’ 같은 노래에서도, ‘샹송’이나 ‘수박빛 선그라스’에 ‘박쥐양산’까지 등장하지만 해수욕 분위기는 찾아보기 힘들다. 바다에서 더 중요한 것은 시원한 경치와 뱃놀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더더구나 여자들에게 휴양지 바다는, 당연히 눈으로만 즐기는 대상이었을 것이다. 1939년 이난영의 노래 ‘바다의 꿈’에서도, 아이스크림이나 청량음료가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의상은 ‘모시치마’였다. 식민지 시절에 여자 수영복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작고한 원로 작사가 겸 가수인 반야월은 1930년대 초에 공연장에서 주연 여배우인 신카나리아의 수영복 브로마이드를 파는 것을 본 적이 있다고 구술했다. 여배우였으니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노출 심한 수영복 차림은 보통 여자들에게는 오랫동안 쉽지 않은 일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러니 해수욕장 배경의 노래들이 모두 ‘여자’를 노래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오랫동안 이러한 문화에 묶여 있던 우리 사회에, 해수욕이 보편적 문화로 자리를 잡으니, 당연히 해수욕장은 수영복 차림의 여자를 마음 놓고 구경할 수 있는 곳으로 먼저 떠올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1. 조개껍질 묶어 그녀의 목에 걸고/ 불가에 마주 앉아 밤새 속삭이네/ 저 멀리 달그림자 시원한 파도소리/ 여름밤은 깊어만 가고 잠은 오지 않네

2. 아침이 늦어져서 모두들 배고파도/ 함께 웃어가며 식사를 기다리네/ 반찬은 한두 가지 집 생각 나지만은/ 시큼한 김치만 있어 주어도 내겐 진수성찬

3. 밥이 새까맣게 타 버려 못 먹어도/ 모기가 밤새 물어도 모두가 웃는 얼굴/ 암만 생각해도 집에는 가얄 텐데/ 바다가 좋고 그녀가 있는데 어쩔 수가 없네

윤형주 ‘라라라’(윤형주 작사·작곡·1971)

아주 건전한 캠핑 송 분위기를 풍기는 노래이지만, 정황을 따져보면 꽤나 과감한 문화다. ‘그녀’와 함께 가 있다니 ‘혼성 캠핑’ 아닌가. 지금도 딸 가진 부모가 혼성 캠핑을 허락하기 쉽지 않은데, 당시로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1960년대 말이 되면 해수욕장에서의 청소년 탈선을 막자는 선도반이 만들어지고, ‘바캉스 베이비’에 대한 우려가 언론에 종종 등장한다.

별이 쏟아지는 해변으로 가요/ 젊음이 넘치는 해변으로 가요/ 달콤한 사랑을 속삭여줘요/ 연인들의 해변으로 가요/ 사랑한다는 말은 안 해도/ 나는 나는 행복에 묻힐 거예요/ 불타는 그 입술 처음으로 느꼈네/ 사랑의 발자욱 끝없이 남기며/ (하략)

키보이스 ‘해변으로 가요’(외국 곡·1970)

재일동포로 일본에서 록그룹을 하던 이철의 작품으로, 일본 대중문화 교류가 막혀 있던 긴 기간 동안 ‘키보이스 작사 작곡’으로 알려져 있던 노래다. 이 역시 여름의 바다는 해수욕장이고, 거기에는 ‘불타는 그 입술’이 배치돼 있다. 그러니 이 ‘달콤한 사랑’은 다른 노래에서보다 훨씬 더 육체적인 의미를 띤다.

일상에서 몸의 노출이 별로 이뤄지지 않았던 우리 사회에서, 이렇게 1970년대 이후의 해수욕장은 실제보다 더 과도하게 남녀의 육체적 접촉 가능성을 ‘상상’하는 공간으로 상정됐다. 수영복 입은 여자의 몸에 관음증적인 시선이 쏟아지고(혹은 그러하다고 상상하고), 이러한 상상으로 봄부터 여자들이 ‘여름휴가 대비 다이어트’에 돌입하는 이 못 말리는 문화는, 이러한 맥락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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