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렷한 여성의식으로 내각의 24% 여성 임명
교육·환경·근로자복지 분야에서 뚜렷한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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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마 호세프 대통령 홈페이지

얼마 후면 전 세계는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이 2014 브라질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시상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될 것이다. 개막식에서 호세프 대통령에게 야유를 보냈던 관중이 이번에는 어떨지. 기반시설과 빈곤 구제도 제대로 되지 않았는데 월드컵에 펑펑 쓸 돈이 있냐는 여론이 만만치 않다.

국가 면적 세계 5위, 인구 세계 5위, 경제는 세계 7대 국내총생산(GDP) 2400조원, 일인당 GDP는 1만 달러 정도로 우리보다 적지만 강대국에 속하는 브라질의 첫 여성 대통령 지우마 호세프는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뽑은 2013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여성 중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에 이어 2위로 등극했다가 2014년에는 4위로 밀렸다.

호세프 대통령은 남편이나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권좌에 오른 ‘공주’형이 아닌 투쟁과 옥고와 행정경험, 전문성을 고루 갖춘 ‘자수성가’형 여장부로서 아르헨티나의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대통령과는 극적으로 대조된다. 한편 여성문제에 무지하거나 무관심한 여성 지도자들과는 달리 호세프 대통령은 여성의식이 뚜렷해 “여성과 모든 사회적 약자를 위해 일하겠다”고 공언하고 내각의 24%를 여성으로 임명하는 등 파격적 조치를 취했으며, 교육·환경·근로자복지 분야에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호세프 대통령의 과거는 급진적이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1947년 12월 14일 불가리아 공산당 출신으로 핍박을 피해 프랑스를 거쳐 브라질로 간 변호사이자 사업가인 아버지와 교사인 어머니의 1남 2녀 중 맏딸로 태어나 중산층 가정에서 성장했다. 말하자면 다문화 가정, 이민자 가정 출신이다. 그녀가 15세던 해에 아버지는 15채의 부동산 건물을 남기고 사망했다. 2년 후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호세프는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길을 택하게 된다. 군사정권하에서 1964년부터 1985년까지 475명이 살해되거나 실종됐으며 고문 및 탄압 등 인권문제가 계속됐다.

호세프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탐독하며 무장 항쟁을 선호하는 민족해방군에 가입했고, 역시 사회주의자인 5년 연상의 신문기자 갈레노를 만나 21세에 결혼했다.

그가 가입한 민족해방군은 도시 게릴라로 은행강도, 차량절도, 폭발사건 등에 연루됐으며 기관총으로 경찰을 사살하기도 했다고 한다. 함께 싸웠던 동료들은 호세프가 무기를 다루었다고 하지만, 본인은 이를 부인하고 있다. 2009년 한 잡지가 경찰조서에 입각해 호세프의 형사범죄 전과를 열거했는데 호세프는 이를 모두 위조서류라고 부인했다. 남편 갈레노가 타지에 파견돼 있는 동안 만난 31세의 변호사 아라우주와 사랑에 빠지고, 함께 VAR 팔마레스(마르크스레닌주의 정치군사기구)를 창설하고, 민주노동당을 창립했다.

1970년에는 체포돼 극심한 고문을 당했지만 룸메이트나 아라우주의 이름은 누설하지 않았고 2년 동안 감옥생활을 했다. 출옥했을 때는 체중이 10킬로그램이나 줄고 갑상샘 병에 걸렸고, 대학에서는 퇴학 처분을 받아 다른 대학으로 전학해 1977년 졸업했다. 그동안 호세프는 아직 감옥에 갇힌 아라우주를 위해 감옥에서 교사로 봉사하면서 출옥을 기다렸고, 1976년에는 그의 딸을 출산했다. 첫 남편인 갈레노와 이혼한 것은 1981년이다. 바람둥이 아라우주와는 1994년에 결별했다가, 다시 재결합, 2000년 최종적으로 이혼하기까지 30년을 동거했다. 그녀의 외동딸은 현재 법대를 나와 검사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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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마 호세프 대통령 홈페이지

딸을 키우면서 호세프는 제도권 정치에 진입했다. 1985년 38세에 시장선거 캠프를 지원한 후 시재무 장관에 취임했고, 1990년에는 주 에너지장관을 지냈다. 1998년에는 주 에너지장관으로서 전문성과 실용성, 객관성을 인정받았다. 2000년에 노동자당에 가입해 룰라 다 실바 좌파 대선후보의 에너지정책위원으로 활동하다가 2002년 룰라가 당선돼 군사독재를 종식한 후에 브라질의 에너지 장관(2003~2005)으로 임명됐고, 대통령 비서실장이 부패 혐의로 사임한 후 5년간 대통령 비서실장(2005~2010)을 지냈다. 룰라 대통령은 그녀의 난국을 헤쳐 나가는 용기, 추진력, 전문성을 보고 그녀를 발탁했다고 했다. 룰라 전 브라질 대통령은 지지율이 87%에 달했으며, 브라질을 남아메리카의 청정에너지 기술 허브와 세계 최대 바이오 연료 생산국으로 만들었고, 강력한 단속으로 불법 벌목을 최대 75% 줄이는 등 그린혁명을 일으켰다는 찬사를 받고 있다. 호세프는 그의 전격적인 지지를 받아 대선에 출마했다.

룰라 대통령의 비서실장으로 4년째였던 2009년에는 임파선암으로 4개월간 항암치료를 받아 머리카락이 다 빠지고 근육병으로 입원하는 등 건강 문제도 많았다. 과거사 및 후보 자질 논란도 있었지만 2010년 대선에서 빈곤퇴치, 교육개혁, 환경보호, 부정부패 근절을 공약으로 내세워 저소득층, 노동자, 청년을 대표하는 후보로 56%의 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됐다.

대통령으로서의 호세프는 마르크시즘에서 실용적 자본주의로 극적인 전환을 했다. 전기요금에서 연방세를 줄이고 소비자 상품에서 연방세를 면제한 정책은 인기가 있었다. 프로라이프로 낙태에 반대하며 동성 결혼에 반대하고, 불법 마약의 합법화에도 반대한다. 동성애에 관한 성교육 자료를 폐간시키기도 했다. 젊었을 때는 급진 좌파였으나 대통령이 돼서는 보수적인 정책을 이행했다.

대통령이 된 호세프는 수많은 반대와 난관을 특유의 뚝심으로 정면돌파해 나갔다. 1만7000명의 노동자가 3주 동안 파업을 하고 방화를 하면서 아마존강의 수력발전댐 건설에 반대했지만 그녀는 군대를 파견해 노동파업을 종식시켰다. 2012년 봄 대학교수 파업에 대해서는 정면돌파로 타협하지 않아 수백만 명의 학생이 몇 달 동안 수업을 받지 못했다. 2013년 6월에는 버스 이용료 인상에 항의해 수백만 명의 주민이 거리에 쏟아져 나와 시위를 해 결국 버스 이용료 인상은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무뚝뚝하고 성질이 불같아 고래고래 소리도 잘 지르는 호세프 대통령은 장관 몇몇을 부패 혐의로 경질했지만 브라질에 만연한 부패를 청렴문화로 바꾸기에는 아직은 역부족이었던 듯하다. 호세프 대통령은 2013년 3월에 79%의 지지도를 기록하는 등 높은 대중의 인기를 유지했지만 최근 4년째 계속된 경제침체로 인해 지금은 34% 정도로 지지율이 떨어졌다. 월드컵이 끝나고 오는 10월 대선에 도전하는 호세프 대통령이 재임하게 될지는 미지수다.

불의에 저항해 투쟁하던 여전사 잔다르크, 이제는 최고 권좌에서 사회의 약자를 위해 부정부패와 빈곤에 맞서 권력을 사용하는 철의 여인, 그녀의 삶으로 인해 앞으로 브라질의 어머니들은 딸의 눈을 똑바로 보고 “그래, 너도 할 수 있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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