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줄 놀이 배경음에서 전쟁 폭력 돌직구까지
나이대별로 전쟁 노래를 다르게 활용하는 여성

 

대중 가요에서 전쟁 속 여성은 늘 우는 어머니와 아내이거나, 군인의 애인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지남에 따라 여성들이 전쟁 자체에 대해 발언을 하기 시작했다. 사진은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주장하며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에서 열리고 있는 수요집회 모습. ⓒ뉴시스·여성신문
대중 가요에서 전쟁 속 여성은 늘 우는 어머니와 아내이거나, 군인의 애인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지남에 따라 여성들이 전쟁 자체에 대해 발언을 하기 시작했다. 사진은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주장하며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에서 열리고 있는 수요집회 모습. ⓒ뉴시스·여성신문

주제가로 더 유명한, 르네 클레망 감독의 영화 ‘금지된 장난’(1952)을 기억하는가. 폴레트와 미셀이라는 두 전쟁고아는 소꿉놀이 하듯 시체 묻는 놀이를 하며 논다. 스무 살 시절에 ‘주말의 명화’로 이 영화를 보았는데 가슴이 아릿했다. 그러나 정작 내가 영화 속 아이들처럼 컸다는 생각을 그때는 하지 못했다. 196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냈던 베이비부머들은 전쟁과 살육의 노래를 아무렇지도 않게 불렀으니 이 아이들과 다를 바 없었는데도 말이다. 

무찌르자 오랑캐 몇 백만이냐/ 대한 남아 가는 데 초개로구나/ 나아가자 나아가 승리의 길로/ 나아가자 나아가 승리의 길로

                            ‘승리의 노래’ 1절(이선근 작사·권태호 작곡, 1951년)

중년 여성 중 이 노래로 고무줄놀이를 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지금은 오랑캐라는 말이 생경한데, 중국 참전으로 압록강에서 퇴각한 때의 노래였으니 이해할 만하다. 동요 ‘대한의 아들’(1954)에서도 ‘우리는 싸우는 대한의 아들딸/ 무찌르고 말 테야 중공 오랑캐’라고 노래한다. 중국에서 ‘동쪽 오랑캐(東夷)’로 불렸던 우리가 도리어 중국에 ‘오랑캐’라고 욕하고 있다는 점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그리고 그 호전성의 수준도 꽤나 놀랍다. 

당시 어린이들은 가사 한 부분을 잘못 부르는 게 태반이었다. 둘째 소절을 ‘대한 너머 가는 데 저기로구나’라는 엉터리 가사로 불렀는데, ‘대한 남아’ ‘초개(草芥)’라는 어려운 말이 이해되지 않는 아이들의 입으로 구전되다 보니 생긴 현상이었다. 이런 현상은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로 시작하는 ‘전우야 잘 자라’의 중간 부분 ‘원한이야 피에 맺힌’을 ‘소나무에 피에 묻힌’이나 심지어 ‘모나미에 이에프지’ 식의 엉터리 가사로 불렀던 것에서도 똑같이 반복된다. 아이들에게 무슨 ‘원한’이 피에 맺혔겠으며, ‘중공 오랑캐’를 ‘초개’처럼 무찌르고 싶었겠는가. ‘금지된 장난’의 두 아이처럼, 그저 놀이를 위해 부르는 노래일 뿐이다. 전쟁 이후에 태어난 여성들은 다들 이런 노래로 놀이를 하며 성장했다.

지금 생각해보건대 전쟁을 겪은 어른들의 노래는 여자아이들에게 참으로 좋지 못한 문화였다. ‘총알이 날아오는 싸움터에서/ 피 흘리는 아저씨를 간호해 주는/ 흰 모자에 적십자 간호언니는/ 천사와 같이도 거룩하지요’(‘간호 언니의 노래’ 중·1959) 같은 노래를 교과서에서 배우며, 여자아이들은 성적 분업을 내면화하여 ‘의사’가 아닌 간호사만을 꿈꾸었다. 대중가요가 그리는 여군의 모습은 ‘치마를 둘러 입고 총칼은 안 들어도/ 나라 위해 일어섰네 여군 미스 리/ 국방색 치마는 미니스커트/ 제비 같은 그 모습이 정말로 예뻐요/ 눈웃음이 매력적인 여군 미스 리’(‘여군 미스 리’ 중·1968) 같은 노래에서처럼 남자들이 보기에 섹시하고 애교스럽기까지 한 여군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성장한 세대가 그래도 처음으로 이 사회에서 전쟁에 대한 회의와 반성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여태까지 전쟁 소재 노래 속 여성은 늘 우는 어머니와 아내이거나, 군인의 애인으로 남자 군인을 돋보이게 해주는 역할만으로 나오던 것에서 벗어나, 전쟁 자체에 대해 발언하기 시작한 것이다.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에/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 것도 살지 않지만/ 먼 옛날 그 연못엔 예쁜 붕어 두 마리/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지요 깊은 산 작은 연못/ 어느 맑은 여름날 연못 속에 붕어 두 마리/ 서로 싸워 한 마리는 물 위에 떠오르고/ 그놈 살이 썩어 들어가 물도 따라 썩어 들어가/ 연못 속에선 아무 것도 살 수 없게 되었죠/ (하략)

                                            양희은 ‘작은 연못’(김민기 작사·작곡, 1972년)

음악은 동요처럼 단순하고 가사 역시 옛 이야기를 해주듯 능청스레 에둘러 말하지만,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인간세상 속 전쟁이란 것이, 패자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승자와 그 주변의 모든 것을 죽게 만든다는 묵직한 메시지는, 양희은이라는 여가수의 탁월한 가창력으로 생명을 얻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페미니즘 노래의 길을 연 안혜경은, 이로부터 조금 더 나아간다. 우화적 설정을 치워버리고 전쟁에 대해 ‘돌직구’를 날리는 것은 물론, 전 지구적인 연대의식까지 지니고 있다. 

너의 그 더러운 입술로 사랑의 노래를 부르지 마라/ 굳건한 너희들의 바리케이드 앞에 우리의 사랑이 위태롭구나/ 숨죽이며 피어나던 한 가닥 불씨는 죽음의 재 속에서 스러지려 하는구나/ (후렴) 아 자유의 노래를 부를 수 없구나/ 아 사랑의 노래를 부를 수 없구나/ 막다른 길목에서 우우우

                  안혜경 ‘카나리아를 보았는가’ (RAWA 작사·안혜경 작곡, 2002) 

아프간여성혁명연합(RAWA)이 2001년 12월 10일 세계인권의 날에 전 세계에 보낸 시에 곡을 붙인 것이다. 전쟁에 분노하는 여자의 생생한 목소리는 꽤나 충격적이다. ‘앵그리맘’은 세계 도처에 있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