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사건 이후 온 국민이 우울증에 빠졌다. 진도 앞바다에서 일어난 기막힌 사고가, 그 사고를 처리하는 과정이 이해되지도 않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것이다. 명치끝에 뭔가가 걸려 토하고 싶은데 토해내지도 못하고 누군가를 향해 돌팔매질이라도 하고 싶은데 힘이 쭉 빠지는 그런 느낌이다.

인간을 대접하지 않는 대한민국이 부끄럽다고, 책임전가만 하는 무능한 대한민국에 화가 난다고, ‘대’자도 빼고 ‘민’자도 빼야 한다고 하는 친구들도 많다. 모두들 화가 난 것이다.

세상을 바꾸는 ‘분노’가 있다. 영웅 아킬레우스의 분노 같은 것! 사실 ‘일리아드’의 주제는 분노, 그것도 영웅의 분노다. 물론 영웅 중의 영웅은 아킬레우스다. 아킬레우스가 트로이전쟁에 참전하지 않았더라면 트로이는 그리스에 패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킬레우스가 트로이의 영웅 헥토르와 맞짱을 뜨고 헥토르를 죽이려 한 것은 바로 ‘분노’ 때문이다. 친구이기도 하고 연인이기도 한 파트로클로스가 헥토르 손에 죽자 격노하여 헥토르를 죽이겠다고 전쟁에 뛰어든 것이다.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아니었던들 그리스가 트로이를 이길 수 있었을까.

싸움에도 격이 있는 법. 헥토르는 영웅답게 영웅 아킬레우스의 칼에 맞고 죽는다. 아킬레우스의 복수는 성공이다. 그런데 헥토르의 죽음으로 사랑하는 이를 잃은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사라졌을까. 답은 ‘아니’다. 그래서 아킬레우스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다. 시신을 존중하지 않은 것이다. 헥토르의 시신을 마차에 매달고는 파트로클로스의 무덤을 뱅뱅 돈다. 이 일로 그는 신의 분노를 산다. 죽음은 신의 영역인데 그 성스러운 영역을 침범했기 때문이다.

그런 행동으로도 잦아들지 않던 아킬레우스의 상실감과 분노가 어떻게 잦아들었을까. 아들을 잃은 상실감에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초라해진 헥토르의 아버지, 트로이의 왕 프리아무스와의 만남 때문이다. 아들의 시신을 돌려달라고 변장을 하고 목숨을 건 행보를 한 프리아무스가 아킬레우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신과 같은 아킬레우스여, 혼자 남아 도시와 백성을 지키던 헥토르가 얼마 전에 그대 손에 죽었소. 아킬레우스여, 내게 연민을 가지시오. 나는 세상에 어떤 사람도 하지 못한 일을 하고 있소. 자식을 죽인 사람 앞에서 손을 내밀고 있으니 말이오.”

헥토르가 어떤 영웅인가. 그는 트로이의 기둥이었으며, 든든한 아들이었고, 든든한 형이었으며, 소중한 남편이었고, 좋은 아버지였다. 그런 헥토르를 잃어버린 늙은 노인의 슬픔을 진심으로 마주하고 나서야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잦아든 것이다.

사람들이 분노를 갖지 말라고 한다. 분노하는 사람의 타액에선 독이 검출된다고 한다. 실제로 아기가 분노하고 있는 엄마의 젖을 먹으면 경기를 한단다. 그렇다고 화가 날 때 화를 억누르기만 하면? 화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화병(火病)이 생긴다. 어찌할 것인가. 나는 ‘일리아드’에 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어떤 것으로도 좀처럼 잦아들 줄 몰랐던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자기보다 더 아픈 프리아무스의 진심을 만나 사그라진다. 그것은 단순히 자기보다 불행한 사람을 보고 위로받는 옹색한 심리가 아니다. 그것은 내 상실감을 진실로 이해하는 마음과 마음의 소통이다. 소통이 곧 화해다. 소통 없는 위로, 소통 없는 화해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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