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6 세월호 침몰은 한국 사회 근대화 과정의 어제와 오늘을 가르는 사건이 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근대화 과정에서 쌓아온 진짜 적폐가 무엇인지 제대로 바라보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기회라는 의미에서다. 진짜 적폐는 근대 국가체제의 국민보호 기능을 무시한 채 ‘규제개혁, 민영화’라는 이름으로 국가와 자본이 키워온 거짓과 탐욕의 정치경제학이다.

무엇이 거짓인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이후 밀려온 신자유주의 물결은 한국 사회에 규제 개혁과 민영화, 이에 근거한 국가 경쟁력 강화, 그리고 “성장의 열매를 키워서 나눠 주겠다”는 끝없는 거짓말로 이어져왔다. 규제 개혁은 합리성을 상실한 채 기업의 탐욕을 채워주는 구실만 하고 있으며 민영화는 국가의 국민생명 구조 의무도 현장에서 따지는 돈의 무게 때문에 뒷전으로 밀리는 영리화로 귀결되고 있음을 이제 생생히 보았다.

지난 MB정권에서 특히 요란하게 떠들어댔던 국가경쟁력은 서구 복지국가들이 이미 근대 국가체제 완성 과정에서 ‘재산권–참정권–사회권’ 확립을 통해 국민보호 기능을 수행해 온 역사적 맥락을 무시한 채 기업 생산능력을 나타내는 지표만 따온 개념이다. 복지제도를 통한 국민보호 기능을 착실하게 수행해 온 국가들이 이에 더해 지속가능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지표로서 국가경쟁력 개념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국가경쟁력 개념의 당연한 전제로서 국민보호 기능은 뒤로 숨긴 채 당장 영리기업 친화적 지표만 국가경쟁력으로 내세웠다. 그래서 국가경쟁력 순위가 10~20위권을 유지하는 국가지만 이제 국민들 사이에서 “국가가 어디 있는가”라는 질문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탐욕은 어떻게 나타났는가? 개발독재시대에 “파이를 키운 후 나누자”고 한 그 거짓말이 이른 바 ‘낙수효과(trickle down effect)’로 바뀌었을 뿐이다. 경제성장으로 커진 열매는 ‘관피아’로 상징되는 관료집단, 탐욕스러운 기업가와 그 가족들, 그리고 국가와 자본의 유착 관계에서 성장한 지역 토호들이 다 나눠 먹었다. 그 과정에서 경제사회적 지위의 양극화는 심화되고 비정규직만 양산됐다. 그리고 어느 목사의 망언대로 불국사에 가야 할 가난한 집 아이들이 제주도로 가는 배에서 죽어갔지만 국가는 아무런 손을 쓰지 않은(혹은 못한) ‘위험의 프롤레타리아화’를 우리는 보아야 했다. 목사는 무의식중에 망언을 했지만 본인이 보고 있는 현실을 사회과학적 용어 없이 본능적으로 정확하게 표현한 것이다. 단, 그 목사는 그러한 위험을 겪지 않을 자신의 처지를 하나님께 무한 감사하고 있을 상황에 우리는 더 분노해야 한다.

핀란드, 독일, 프랑스, 영국 등은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 수준일 때 국내총생산 대비 사회복지비 지출 비율이 20% 수준이었다. 우리는 같은 경우 5%가 안 되는 수준이었고, 2만3000달러에 육박한 2012년에도 약 10% 수준이었다. 부질없는 가정이지만 우리나라에서 그 비율이 20% 정도인데도 세월호 사건이 터졌을까? 1인당 국민소득이 아무리 올라가도 그 열매 배분의 지표가 되는 사회복지비 지출 비율은 다른 국가들 1만 달러 시대의 절반 정도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파이가 됐든 위에서 떨어지는 무엇이 됐든, 커지면 나눠준다는 것은 거짓이다. 그 거짓의 결과 양산된 비정규직, 나만 살아야 한다는 처절한 생존경쟁의식,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탐욕스러워진 정경유착 체제가 이제 임계점에 달한 것 아닐까?

지속가능한 발전·성장은 근대국가체제가 역사적으로 보여준 국민보호 기능을 수행할 때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 우리사회의 적폐가 무엇인지 이제 그 민낯을 똑바로 보도록 하자. ‘규제개혁·민영화’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무한 영리화를 추구하며 성장한 탐욕의 정치경제학이다. 세월호 침몰과 함께 진정한 적폐를 바라볼 수 있는 이 기회를 이번에 또 그냥 지나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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