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문제에 대한 노래로 ‘착각’하며 부른 ‘이 세계 절반은 나’
실은 전 지구적인 남북 문제, 빈부 격차를 다룬 노래
엇, 이게 뭐야! 옛날 신문에서 ‘세계 여성의 날’을 검색해보았다. 예상은 했지만, 아, 정말 심하다. 1920년부터 1984년까지 거의 전무! 1982, 83년에 잠깐 외국의 행사가 해외 토픽으로 보도된 것뿐이다. 우리나라의 ‘세계 여성의 날’ 기사는, 딱 한 해, 바로 1975년이다. 1975년은 유엔이 ‘여성의 해’로 지정한 해였다. 1911년부터 행사를 해왔고 1913년부터는 3월 8일로 러시아 같은 후발 자본주의국까지 기념하기 시작한 이 날을, 1975년에 유엔이 공식 기념일로 인정했다.
혹시 ‘유엔데이’란 날을 기억하는가? 이걸 기억하면 40대 후반 이상, 못해도 그 이하다. 왜냐고? 1975년까지 그날은 ‘빨간 날’이었다. 국제연합일(유엔데이)은 이토록 엄청나게 기념하면서, 유엔이 정한 ‘여성의 해’인 1975년에 우리는 ‘세계 여성의 날’ 행사조차 하지 못했다. 여성계에서 기념행사를 하려 했으나 준비 미비로 무산됐다. 그나마 ‘행사조차 하지 못했다’는 기사라도 나온 것이, ‘세계여성의 날’ 관련 보도로서는 1970년대까지 유일한 것이다. 처참하고 슬픈 일이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오히려 식민시대에는 여성 인사들끼리 기념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분단 이후에는 그마저 끊겼다. ‘세계 여성의 날’은 미국 여성 노동자들의 시위로 촉발된 날 아닌가. 아직도 노동조합의 파업을, 합법과 불법을 가리지 않고 ‘종북좌파’의 짓이라 낙인찍는 일이 흔하니, 그 시절 ‘세계 여성의 날’이라고 무사할 리가 없었다. 노동절도 전 세계가 공유하는 메이데이가 아니라 한국노총 창립일을 기념해야 했고, ‘세계 여성의 날’은 아예 사라진 것이다. 1985년부터야 14개 단체가 모여 겨우 행사란 걸 하게 됐고, 행사다운 행사는 6월 시민항쟁 이후인 1988년부터였다. 여성 대통령의 존재가 무색하게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낮은 우리나라의 여성 상황은, 이렇게 ‘세계 여성의 날’ 역사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러니 대중가요에서 페미니즘 운운하는 것은, 정말 오랫동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페미니즘이든 민주주의든, 뭔가 아래로부터의 불만을 바탕으로 세상에 문제 제기를 하는 모든 것들을 불온하게 여겼던 우리나라 풍토에서, 대중가요가 이런 이야기를 담는 것을 곱게 보아 넘길 리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민주화운동 하는 사람들끼리 부르던 이른바 ‘민중가요’에서조차 여성문제에 대한 노래는 딱 하나, 이 곡뿐이었다.
1. 가요 가요 나는 가요 꽃가마 타고 가요/ 머리에는 꽃관 쓰고 온 몸엔 색동 입고/ 가요 가요 나는 가요 꽃가마 타고 가요/ 잘못 되면 어떡하나 걱정 잔뜩 받고/ 가요 가요 나는 가요 꽃가마 타고 가요 오/ 사람이 아냐 생명이 아냐 손때 묻은 노리개예요
2. 가요 가요 나는 가요 꽃상여 타고 가요/ 눈에는 꿀 바르고 입에는 대추 물고/ 가요 가요 나는 가요 꽃상여 타고 가요/ 잘못하나 어디 보자 눈총 잔뜩 받고/ 가요 가요 나는 가요 꽃상여 타고 가요 오/ 사람이 아냐 생명이 아냐 길들인 짐승이에요
3. 가요 가요 나는 가요 훨훨 벗고 가요/ 싱그러운 몸 냄새로 싱그런 목소리로/ 가요 가요 나는 가요 훨훨 벗고 가요/ 나대로 살련다 바람 잔뜩 안고/ 가요 가요 나는 가요 훨훨 벗고 가요 오/ 목석이 아냐 짐승이 아냐 하늘 같은 사람이에요
-‘가요, 나는 가요!’(김문환 작사, 이요섭 작곡·1970년대 중반)
YMCA와 크리스찬아카데미 등에서 활동했던 김문환(후에 서울대 미학과 교수를 지냄)이 작사를 하고 동요와 건전가요, 대중가요를 넘나들며 노래를 지었던 이요섭이 작곡했다. 당시 크리스찬아카데미는 ‘중간 집단 양성’에 주력하고 있었고, 노래책 ‘내일을 위한 노래 169곡’(1977)을 편집하며 교회·청년·노동(산업)·농촌·여성의 다섯 분과의 요구들을 수렴한 결과, 여성분과의 요구를 반영한 작품으로 이 노래가 들어간 것이다. 운동권 학생들이 여성문제에 대한 자각을 하면서 부를 수 있는 유일한 노래였지만, 체험적 절실함보다는 그저 공부해서 얻은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수준의 노래였다.
그러나 이뿐이었다. 오죽이나 노래가 없었으면 ‘이 세계 절반은 나’를 여성문제에 대한 노래라고 생각하면서 불렀을까. 사실 이 노래는 ‘이 지구상의 절반의 사람 내 이름 바로 그것/ 커다란 창고 가득 찬 곡식 나와는 너무 머네’라는 가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여성문제에 대한 노래가 아니라 전 지구적인 남북문제, 빈부 격차의 문제를 다룬 노래다. 그런데도 1980년대 중후반 여학생의 학생운동 참가가 늘어나면서 이 노래를 여성문제에 대한 노래로 ‘착각’하며 불렀다. 요즘 애들 말로 ‘안습’(안쓰러워 눈이 촉촉해진다는 의미의 인터넷 속어)이다.
여학생들이 ‘가요, 나는 가요!’를 부르면, 남학생들은 곧잘 마지막 구절 ‘손때 묻은 노리개예요’만 반복하며 조롱했었다. 그 남학생들은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을까, 갑자기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