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동수 지지자들은 남녀동수는 여성할당제가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남녀동수는 대표자가 될 동등한 권리 실현을 위해 50대 50이라는 대의제의 원칙을 주장하고 있어 결과적으로 일정 정도의 할당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남녀동수와 여성할당제는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왜 남녀동수 지지자들은 다르다고 하는 걸까? 50%와 30%라는 양적 차이 이상의 다른 의미가 있는 걸까?

남녀동수와 여성할당제는 여성에 대한 이해, 즉 출발점이 다르다. 남녀동수에 있어 여성은 추상적 개인, 즉 이성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존재다. 여성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인종, 종교, 계급 등 모든 사회적 범주와 집단에 존재하기 때문에 여성이라는 공통의 특수한 이해관계를 가질 수 없다고 본다. 여성과 남성의 차이는 단지 생식기관의 차이, 즉 생물학적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여성은 남성과 더불어 인간 종의 절반과 주권을 가진 시민의 절반을 구성할 뿐이다. 따라서 대표되는 시민의 절반이 여성이듯 대표하는 자의 절반도 여성이어야 한다는 논리다.

반면 여성할당제에서 여성은 추상적 개인이 아닌 공통의 이해와 정체성을 가진 사회적 범주로서의 위상을 갖는다. 여성은 남성과 다른 이해와 정체성을 대변한다. 여성은 단지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억압과 차별을 당했고, 열등한 존재로 취급돼 공적인 영역에서 배제돼 왔다. 이러한 여성들의 차별과 억압 그리고 배제에 대한 경험은 여성들로 하여금 공통의 이해와 공통의 정체성을 형성하게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억압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대표하는 자의 일정 부분을 여성에게 할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녀동수에 있어 동수는 인간은 여성 혹은 남성으로만 태어난다는 점에서 천부인권에 해당된다. 따라서 남녀동수는 여성의 천부인권을 침해한 남성들의 과잉대표성 문제에 집중한다. 여기서 남녀동수의 50%는 절대적이다. 그래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동수, 절반의 권리를 요구한다. 반면 여성할당제에서 할당은 미래의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과거의 차별에 대한 현재의 보상의 의미를 갖는다. 여성할당제는 여성의 열악한 현실을 반영한 여성의 과소대표성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여성할당제에서 할당은 상대적이다. 할당의 크기는 정치적 현실과 변화를 주도할 수 있는 세력에 의해 정치적으로 결정된다. 그래서 10%를 요구할 때도 있고 30~40%를 요구할 때도 있다.

여성할당제의 한계는 여기서 비롯된다. 여성할당제는 왜 30%여야 하는가에 대한 정당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 20%는 안 되고 30%와 40%는 되는 이유, 즉 할당의 크기에 대한 정당성이 취약하다. 이러한 취약성은 남성들이 역차별을 주장할 수 있는 빌미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남녀동수는 역차별 논란에서 자유롭다. 50대 50은 여성이 차별받은 만큼의 몫이 아닌 인간 종의 이원성에 기초한 여성에게 당연하게 부여돼야 하는 권리의 크기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이 남성의 권리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빼앗긴 여성의 권리를 회복하는 것이 된다.

남녀동수와 여성할당제는 다른 출발점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서로 다른 위치에 있는 두 점이 하나의 꼭짓점을 향해 나아가는 삼각형과 같이 남녀동수와 여성할당제는 하나의 목표인 성평등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서로 다른 위치에 서 있는 두 점이다. 남녀동수는 원칙을 더 강조한 전략이라면 여성할당제는 현실을 더 고려한 전략이다. 여성할당제를 도입한 지 10년이 넘어선 지금 우리의 성평등 정치 실현을 위한 전략에 대한 진지한 점검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