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에 인생을 담는다

새해가 지나 나이가 꼴딱 10단위를 넘어버린 때의 느낌은 참으로 묘하다. 어릴 적에는 한 살 먹을 때마다 마치 설날 아침에 고운 한복 입을 때처럼 설레는 느낌이었지만, 스물을 넘기면서는 5년을 넘길 때 혹은 10년을 넘길 때 그런 느낌을 느낀다. 한 해는 어찌나 빨리 가는지, 정신없이 보낸 어제 아침 기억은 아득한데 10년 전 일은 바로 엊그제 같다.

여자도 사람이니 나이를 먹고, 머리와 가슴이 있으니 생각도 하고 느낌도 있건만, 1980년대까지 대중가요에서 나이를 먹으며 인생에 대해 생각하는 여자들의 노래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대중가요 속 여자들은 늘 어리고 젊은 여자들이고, ‘낙엽만 보면 괜히 슬퍼’지고(혜은이 ‘작은 숙녀’), ‘바쁠 때 전화’해서 ‘참새처럼 떠들어도 여전히 귀’엽게 보이기를 바라는(이선희 ‘알고 싶어요’) 여자로만 등장한다.

최혜영의 ‘그것은 인생’처럼, 가끔 ‘인생’을 이야기하는 노래가 없진 않았으나 ‘어릴 때는 엄마가 필요하고 아하/ 커가면서 애인도 필요하고’ 같은 구절에서 알 수 있듯 소녀를 갓 벗어나는 여자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니 아무리 부모로부터의 독립을 이야기한다 해도, 진정한 독립이라기보다는 남자 만나 연애하고 결혼하겠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나이를 먹어가며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는 노래는 모두 남자들이 짓고 부르는 노래였다. 1970년대 장계현의 ‘나의 20년’도 그렇고, 1980년대 이장희의 ‘내 나이 육십하고 하나일 때’도 그렇다. 1990년대 중반의 이 노래까지도 말이다.

또 하루 멀어져간다/ 내뿜는 담배연기처럼/ 작기만 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속에/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 (하략)

김광석 ‘서른 즈음에’(강승원 작사·작곡, 1994)

이 노래를 여자가 불러 발표했다면 과연 이토록 크게 히트할 수 있었을까? 글쎄, 이 정도의 느낌을 소화해도 어색하지 않은 여자 가수의 이미지가 그 시절에는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물론 양희은이나 한영애 정도면 어울릴까? 하지만 1990년대 그들의 나이는 ‘서른 즈음에’를 부르기엔 어울리지 않았다. 당시 인기를 누렸던 강수지나 박미경이 이 노래를 불렀다면? 과연 히트할 수 있었을지 잘 상상되지 않는다. 여자 가수는 늘 예쁘고 섹시한 매력으로 호소력을 발휘했고, 서른이니, 인생이니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이미지였다. 여자에겐 이 정도의 사유와 반추조차 어울리지 않는다는 편견이 여전히 1990년대까지 대중들 마음속에 지배적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니 스물한 살 첫사랑을 반추할 수 있는 나이에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여자의 노래가 이렇게 스스로의 자작곡으로 나오는 것은 ‘살짝’ 감동스럽다.

바람에 날려 꽃이 지는 계절엔/ 아직도 너의 손을 잡은 듯 그런 듯해. 그때는 아직 꽃이 아름다운 걸/ 지금처럼 사무치게 알지 못했어/ 우 너의 향기가 바람에 실려오네/ 우 영원할 줄 알았던 스물다섯 스물하나

자우림 ‘스물다섯, 스물하나’(김윤아 작사·작곡, 2013)

자우림의 리더 김윤아가 마흔을 맞으며 발표한 노래다. 언뜻 보기에는 달콤한 사랑 노래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들을수록 지나간 젊었던 시절을 되돌아보는, 나이 든 여자의 느낌이 우러나온다. 어리고 젊은 매력을 넘어서서, 마흔이 돼서까지 자신의 작품 세계를 스스로 만들어내고 유지하는 여자 가수들이 있어야만, 여자들의 노래에 인생 이야기가 담길 수 있다. 1990년대 이후가 돼야만 우리는 이런 노래들을 만날 수 있게 됐다. 참, 오래도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