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 사각지대에 있는 취약 계층에 관심 가져야
범죄 예방 시스템 강화는 공동체의 책임
고1 A(16)양은 노래방에서 우연히 합석하게 된 남성 B(28)씨가 집에 데려다 주겠다고 해 함께 택시에 탔다. 하지만 택시는 A양의 집과는 멀리 떨어진 곳에 도착했고 B씨는 도망치려는 A양을 끌고 자신의 집으로 가려고 했다. A양은 “살려달라”며 비명을 질렀고 곧 동네 주민이 집 밖으로 나와 이들을 발견했다. A양은 “도와달라”고 필사적으로 도움을 요청했지만 주민은 그냥 집으로 들어가버렸고, 다른 사람들은 집 밖으로 얼굴도 내밀지 않았다. 결국 A양은 B씨의 집으로 끌려가 성폭행을 당했다.
2010년 부산 금정구에서 발생한 이 사건은 성폭력에 대한 우리 사회의 무관심이 얼마나 심각한지 보여준다. 성폭력뿐만 아니다. 가정폭력 또한 집안일로 치부해 주변에서 개입하기를 꺼려하고, 학교폭력의 경우에도 주변 학생들의 무관심으로 폭력의 정도가 심해지는 것을 종종 목격한다. 주변의 무관심 속에서 여성들이 느끼는 안전 체감도는 더욱 낮을 수밖에 없다.
지난해 8월 안전행정부가 실시한 ‘4대악 국민안전 체감도 조사결과’에서는 일반 국민 10명 중 2명만이 ‘우리사회가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국의 19세 이상 일반 성인 1000명, 학계·법조인 등 전문가 1000명, 중고생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이 조사에서 성폭력에 관해서는 일반 국민 54.3%, 전문가 41%, 중고생 52.7%가 ‘안전하지 않다’고 응답했다. 특히 여성은 3분의 2 이상(성인 66.9%, 중고생 67.9%)이 ‘불안하다’고 응답해 여성들의 안전 체감도가 매우 낮음을 알 수 있다. 성폭력으로부터 안전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일반 국민과 중고생은 ‘가해자 처벌과 재범 방지 노력 미약’을 꼽았고, 전문가는 ‘예방교육 부족 및 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지적했다.
이 조사에서 국민의 38.1%가 박근혜정부 출범 이후 ‘안전정책이 강화됐다’고 인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나 여성들이 느끼는 안전 체감도는 그리 높지 않았다. 혼자 사는 여성을 위한 ‘홈 방범 서비스’나 여성들의 밤길 귀가를 돕는 ‘안심귀가 스카우트’ ‘범죄 예방 환경디자인(CPTED·셉테드)’ 등 안전 대책이 실제 효과가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전문가들은 정책의 효용성을 따져볼 수 있는 피드백이나 모니터링과 함께 사회 구성원들의 폭력에 대한 감수성을 향상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또 안전을 위해 제시된 정책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윤덕경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취약계층과 안전정책 사각지대에 있는 이들을 위한 맞춤 정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윤 연구위원은 “방과 후 혼자 있는 아이들이나 부모의 돌봄에서 방치된 아이들을 위해 지역아동센터 같은 돌봄 시스템이 더 많아져야 하고, 공간적으로도 재개발 지역이나 저소득층 거주 지역에 우범지대가 많아지면 범죄가 늘기 때문에 이들 지역의 여건 개선을 위해 예산 투입이 늘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안심귀가 스카우트나 택시 안전귀가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는 새벽에 출퇴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나, 저소득층을 위한 맞춤형 정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조중신 한국성폭력위기센터 소장은 “안심귀가 서비스를 요청하고 이용할 수 있는 여성들은 비교적 안전에 취약하지 않다”며 “술에 취해 일어나는 성폭력 사건이나 지적장애 여성 등 취약한 피해자들에 대한 보호가 우선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조 소장은 이어 “폐쇄회로TV(CCTV)와 가로등 같은 안전을 위한 하드웨어는 기본적으로 확대하되 사회 전반적으로 술에 대해 관대한 문화를 바꾸는 것도 필요하다”며 “안전은 자신과 다른 사람뿐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노력해야 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백미순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안전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백 소장은 “두려움을 강조하면서 여성들이 행동을 조심하고 행동 반경을 축소해야 하는 패러다임이 아니라 여성들이 어떤 행동도 자유롭게 할 수 있으면서도 안전할 수 있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며 “성폭력이나 가정폭력에 대해 주변인들이 서로 살펴보고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줄 수 있는 예방 시스템을 강화해야 한다. 폭력과 안전에 대한 사회 구성원의 감수성을 높이는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끝>
‘연말연시 안심귀가 캠페인’은 ㈜만리와 ㈜한비즈컨버전스가 함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