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에서 최서희는 엄청난 자산을 쌓고서도 두 아들을 위해 근심한다. 친일의 제스처도 마다하지 않고 만주의 무역을 통해 재물을 모은 그는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꿈꾸며 맹세한다. “내 귀여운 것들, 너희들을 말귀에 달고서 만주 땅을 헤맬 순 없다!”

그래, 나라 없는 백성이 아무리 재물이 많다 한들 어찌 편한 잠을 잘 수 있었으랴. 그래서 ‘부자의 품격’을 갖추기 어려웠을까. 흔히들 외국 부자들은 기부도 잘 하고 죽을 땐 자신에게 돈을 벌게 해준 사회에 재산을 잘도 환원하는데, 한국 부자들은 ‘갑질’이나 하면서 제 욕심만 차린다고 졸부 취급을 한다.

하기야 긴 식민 지배와 분단을 거치고 다시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으며 근대를 통과해 온 한국에서는 아무리 재물을 쌓은 부자라도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으리라. 정경 유착 속에 덩치를 키운 재벌들 역시 곡예하듯 정치권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에서 정치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으리라.

앞선 세대의 이런 기막힌 세월을 거쳐 고도 성장기를 통과하고, 이제 대한민국은 품격 있는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또 다른 역사의 길목에 서 있다. 이 길목에서 교육과 복지가 강조되는 이유는 그것이 부자든 빈자든 미래 세대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약속하는 가장 확실한 투자이기 때문이다.

복지와 경제 활성화가 양립 불가능하다고 보는 이들이 있지만, 이는 경제가 어려울 때 복지지출이 더 늘어나는 데서 오는 착시현상일 것이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대체로 복지지출이 5% 늘어날 때 경제성장률이 1% 늘어난다고 한다. 사회복지 서비스는 또 고용 창출 효과도 커서 제조업의 고용유발계수가 6.8명, 건설업 14.7명, 서비스업 13.0명 등 전체 산업 평균이 9.8명인 데 비해 사회복지 서비스의 고용유발계수는 41.2명으로 조사된 바 있다.

그런가 하면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우리 사회의 갈등지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종교분쟁으로 시끄러운 터키 다음으로 높다고 한다. 갈등지수를 10% 끌어내리면 경제성장률이 1.8~5.4% 늘어난다는 통계조사도 있다. 이러한 갈등을 줄이는 사회안전망으로 교육과 복지의 역할이 중요하다.

최근 무상보육과 무상급식 예산을 둘러싸고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간, 교육청과 지자체 간에 갈등이 첨예해지고 있는데, 때마침 김상곤 경기도교육감이 복지국가를 위한 사회적 합의체 구성을 제안했다. 그는 2009년 보편적 무상급식 논쟁에 불을 지핀 장본인으로 박근혜 대통령에게 “십자가를 지는 심정으로 복지공약 준수와 증세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이른바 부자 증세는 자칫 부자가 빈자를 먹여 살리는 시혜로 복지를 오해할 수 있기 때문에 중산층까지 포함해 능력별로 보편 증세가 좋을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무상급식이든 노인연금이든 대상자가 소득이나 자산에 관계없이 보편 복지의 수혜를 받게 하면 소득조사 등의 행정비용을 줄이고 기준을 둘러싼 비리, 시비 등 복지 투명성도 높일 수 있으리라. 부자에게까지 웬 복지냐고? 세금을 더 내면 되는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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