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 100주년 맞아 기념박물관 건립에 박차… 남이섬에서 특별전시회와 노래비 제막도

민요의 대중가요 전환, OST 시도 등 선구자 업적 제대로 평가되길
“내가 스승이고 곧 제자다” 부친 생전 말씀 이제는 이해돼

 

“운다고 옛 사랑이 오리요만은~ 눈물로 달래보는….”(‘애수의 소야곡’ 일부·박시춘 작곡·남인수 노래)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전우야 잘 자라’ 일부·박시춘 작곡·육군합창단 노래)

한국인이라면 어렸을 때부터 한 번쯤 들었을 법한 친숙한 노래들. 이들 국민가요의 창조자는 작곡 인생 42주년을 기념해 꾸며진 가요무대(KBS1·1973년 10월)에서 “나의 이 노래들을 기꺼이, 영원히 사랑했던 이 땅의 국민들께 드립니다”라고 선언했다. 그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대중가요의 눈부신 성장도,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K팝 한류 열풍도 과연 가능했을까. 평생 3000여 곡의 대중가요를 작곡하며 1930년대부터 60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대중가요의 흐름을 이끌었고, 그 이후에도 이런저런 모습으로 영향을 끼쳐온 작곡가 박시춘(1913~96) 선생의 이야기다.

“애수의 소야곡, 신라의 달밤, 굳세어라 금순아 등으로 대중가요 기틀 마련”

오는 10월 28일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 작곡가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지난해부터 이 기념비적인 날을 위해, 그리고 이를 기점으로 박시춘 선생의 예술 인생을 ‘박물관’이란 문화유산으로 남기기 위해 이런저런 다양한 시도와 노력을 기울여온 그의 딸 박미연(사진)씨를 만났다. 인터뷰는 자연스럽게 혈육이자 문화사업가이기도 한 딸의 눈을 통해 본 주관적이면서도 객관적인 선생에 대한 역사적 평가로 흘러갔다.

박시춘 선생의 3남3녀 중 셋째 딸인 그가 부친의 사후 재조명 작업에 적극 뛰어들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7월 부친의 유업을 잇던 막내 남동생 박재정씨가 심근경색증으로 돌연 유명을 달리하면서부터다. 박재정씨는 1970년대 남성 포크듀오 ‘그린빈스’로 활동하기도 했고, 후에 국민대 실용음악과 교수를 역임하는 등 평생 대중가요와 함께 살았기에 부친의 100주년 기념사업에 남다른 열정과 애착을 보였었다.

“아버님 삶과 음악은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근대사 역할을 했다고 봐요. 작곡하신 곡 하나하나가 다 근대사의 격동기를 관통하면서, 대중과 함께하면서 희로애락을 표현하셨죠. 시대상을 다 노래로 나타내신 셈이에요.

남인수씨가 부른 ‘애수의 소야곡’은 잃어버린 조국을 ‘옛사랑’으로 은유해 일제강점기의 암울함과 민족의 애환을, 현인씨가 부른 ‘신라의 달밤’과 ‘럭키 서울’은 광복의 기쁨을, 그리고 남인수씨의 ‘가거라 삼팔선’과 ‘이별의 부산 정거장’, 현인씨의 ‘전우야 잘 자라’와 ‘굳세어라 금순아’, 신세영씨의 ‘전선야곡’ 등은 6·25의 아픔과 분단의 비극, 피란민에 대한 위로를 나타낸 거죠. 지금 한류가 대단하긴 하지만 아버님께서 그 뿌리를 만들어놓으셨다고 많은 분들이 말씀하시죠.”

박시춘 선생의 100주년 기념 준비 작업은 지난해부터 본격화됐다. 지난해 10월 9일 서울 방이동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국민작곡가 박시춘 탄생 100주년 헌정음악회-애수의 소야곡 2012’가 대대적으로 열려 원로가수 이미자씨부터 신세대 가수 보아, 김범수, 슈퍼주니어에 이르기까지 세대를 아우른 가수들이 나와 박시춘 선생의 히트곡을 열창했다. 특히 선생의 막내아들 고 박재정 교수의 아들 창조군이 무대에 등장, 자작곡 ‘소나무’와 직접 편곡한 할아버지의 ‘럭키 서울’을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이어서 지난 8월 3일부터 12월 31일까지 남이섬 노래박물관 1322㎡(400여 평)의 특별전시실에서 ‘박시춘과 함께하는 한국 대중음악사 여행’ 전시가 열려 선생이 남긴 친필 악보, 악기, 연주복, 당시 사진 등이 전시되고 있다. 선생의 탄생일인 10월 28일 당일엔 대중음악평론가 박성서씨가 쓴 ‘박시춘 평전’이 발표되고 선생의 대표 곡 중 하나로 소리꾼 장사익씨가 글씨를 새겨 넣은 ‘봄날은 간다’ 노래비 제막식이 열린다.

‘1930년대-대중음악 개화기·저항가요 시대, 1940년대-우리말과 노래도 함께 해방된 8·15 광복과 남북분단 가요 시대, 1950년대-한국전쟁과 전쟁가요, 그리고 2000년대 한류에 이르는 시대별 기록전’이란 전시의 특성 자체가 선생의 평생 삶의 반영이다. 21일엔 ‘가요무대’를 통해 100주년 스페셜 방송이 나가는 한편, 제주도 모슬포 인근에 전쟁가요박물관을 건립하자는 논의도 활발하다. 선생이 한국전쟁 당시 제주도 제1훈련소에서 남인수, 유호, 금사향 등 당대의 가수들을 이끌고 군인들을 위로하는 군 예대 활동을 펼쳤기 때문이다.

“그동안 아버님의 노래비는 ‘비 내리는 고모령’의 고모령, ‘신라의 달밤’의 불국사, ‘이별의 부산정거장’의 부산 등 곡과 인연이 있는 여러 곳에 있고, 특히 제주에도 ‘서귀포 70리’ 덕분에 노래비가 있습니다. 피란 시절 제주도에서 군 예단 단장을 하실 당시 내 나이가 서너 살 정도여서 어렴풋한 기억만 있지만 그래도 전쟁터를 누비고 다니느라 늘 조마조마했던 기억이 나요. 당시 군인 훈련소를 직접 방문하신 후 ‘삼다도 소식’을 작곡하기도 하셨는데, ‘이 전쟁가요는 대포 소리 못지않은 큰 힘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시곤 했다고 해요.”

“전쟁가요는 대포 소리 못잖은 큰 힘 가지고 있다”는 말씀 아직도 생생해

선생의 슬하 여섯 자녀 중 선생의 자질을 가장 많이 이어받은 자녀는 아들 고 박재정 교수와 딸 미연씨다. 미연씨는 노래를 상당히 잘 불러 선생이 음반 취입을 권유할 정도로 인정받았으나, 이른 결혼과 완벽주의자인 부친의 평소 지론, “1등이 되지 못하려면 아예 기타조차도 잡지 마라”는 말 때문에 가수의 길을 일찌감치 포기했다. 그래서일까. 그는 생전 부친을 베토벤에 비견하는 천재 작곡가로 기억하고 있다.

“아버님은 입버릇처럼 ‘다시 태어나도 이 (작곡가의) 길을 갈 것’이라며 ‘나 자신이 스승이자 제자다’란 말로 당신의 삶을 규정하시곤 했어요. 어렸을 땐 그 의미를 잘 몰랐으나 후에 스스로 외롭게 대중음악의 길을 개척하셨다는 뜻인 것을 깨달았어요.

아버님은 피아노, 바이올린, 드럼, 아코디언 등 모든 악기에 능하셨는데도 작곡을 하실 때면 반드시 기타로만 하셨어요.(작사가 유호씨는 선생을 ‘당대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평가하기도 했다. 실제로 선생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기타 독주 음반을 발표하기도 했다.) 아버님의 작업실에 슬며시 들어갔다가 작곡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곤 했어요. 기타 줄을 열정적으로 퉁기시면서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수많은 음표를 악보에 그려 넣으셨어요. 그러곤 발을 한 차례 탁 치시곤 다시 음표를 수없이 그려 넣으셨죠. 어린 마음에도 ‘어떻게 그 많은 콩나물 대가리들이 이렇게 쏟아져 나오지’ 하며 의아해했어요. 아버님이 ‘신라의 달밤’을 5분 만에 작곡하셨다는 말도 전혀 근거가 없는 건 아닌 것 같아요.”

18세 때 ‘애수의 소야곡’을 작곡한 선생의 천재적 음악성은 집안 내력과도 무관치 않았다고 한다. 선생의 부친이 고향인 경남 밀양에서 가장 큰 권번(券番)을 운영했는데, 당시 권번은 기생 양성소라기보다는 음악학원에 가까웠다고 한다. 절대음감을 지녔던 선생은 이미 네다섯 살 무렵 학생들을 가르치는 부친 무릎에 앉아 수업 광경을 지켜봤고, 학생들도 노래가 막히면 “순동(선생의 본명)아, 그 다음엔 어떻게 되지?‘ 넌지시 물어볼 정도였다. 선생의 부친 박남포씨는 지금의 ‘말양아리랑’을 보존한 공로를 인정받아 밀양아리랑 노래비에 개사자로 기록돼 있다.

 

지난 8월 초부터 올해 연말까지 남이섬 노래박물관에서 진행 중인 박시춘 작곡가 탄생 백주년 기념 특별전시회 포스터. ⓒ남이섬 노래박물관
지난 8월 초부터 올해 연말까지 남이섬 노래박물관에서 진행 중인 박시춘 작곡가 탄생 백주년 기념 특별전시회 포스터. ⓒ남이섬 노래박물관
딸인 그가 가장 높이 평가하는 아버지의 업적은 새로운 시도를 통한 선구자적 역할이다.

“민요 시대에서 가요의 시대로 전환시킨 당사자가 바로 아버님이세요. 집안 내력으로 초창기 노래엔 민요를 가요 식으로 편곡·작곡한 곡들이 많았어요. 이를 ‘신민요’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난영씨가 부른 ‘산호빛 하소연’이나 배비장 같은 어설픈 카사노바를 노래한 ‘신풍난봉’ 같은 노래가 거기 속하죠.

곡에 갖가지 효과음을 넣은 것도 독창적 시도였다고 생각해요. 악기로 ‘신라의 달밤’에 목탁 소리를, ‘이별의 부산정거장’에는 기차 바퀴 소리를, ‘아메리카 차이나타운’에는 중국적 색채가 짙은 여러 효과음을 삽입하셨으니까요. 

1949년 럭키레코드사를 설립해 남인수, 현인, 백설희 등 수많은 가수들을 배출하셨어요. 후배 사랑이 유별나 집안이 늘 예술인들로 북적거리곤 했는데, 그들을 위해 가사도우미 두 명을 두고 외할머니까지 오셔서 음식을 해내올 정도였어요.(웃음) 1960년대 한국연예인협회 초대 이사장을 맡아 활동하신 거나 한국가요작가협회, 한국가요작가동지회 등을 이끄신 것도 다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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