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경은학교 장애인태권도 코치 윤현숙씨
제1회 전국장애인태권도선수권대회 첫걸음을 내딛다
태권도복을 입은 아이들의 얼굴이 해맑고 활기찼다. 제각기 준비한 기량을 뽐내려 더운 줄도 모르고 구슬땀을 흘렸다. 지난 6일 경기 의정부 경민대학교에서 열린 ‘제1회 전국장애인태권도선수권대회’에서다. 한편에 걸린 현수막이나 간간이 보이는 휠체어가 아니라면 이곳에 모인 이들이 장애인이라는 걸 믿기 힘들었다.
태권도는 한국을 대표하는 스포츠이자 무술이다. 우리나라 운동 중 올림픽에서 채택된 유일한 종목으로, 1973년 세계태권도연맹이 만들어져 지금은 200여 개국에서 약 8000만 명의 사람들이 태권도를 즐긴다. 국기 태권도는 세계화에 성공했다. 하지만 장애인들에게는 아직도 문이 좁다. 2011년에야 세계장애인태권도연맹이 만들어졌고, 전국 규모 장애인태권도대회도 이제 막 걸음마를 뗐다. 대한장애인태권도협회는 이 대회에 앞서 일반인과 장애인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대회를 1년에 한 번씩 3차례 실험했고 올해 처음으로 독립대회를 열었다. 본격적으로 태권도의 기량을 보일 수 있는 종목도 늘렸다. 태권체조, 기본동작, 품새 등 기존 종목에 이동목표물발차기, 지적장애인겨루기 종목이 추가됐다. 장애인 태권도에 대해 경은학교 윤현숙(32) 코치에게 들어봤다. 윤 코치는 이날 경은학교 학생들과 축하공연을 선보였다.
“반복에 반복을 수없이 해도 아이들은 동작을 까먹기 일쑤예요. 그래서 한 곡을 위해 일찍부터 준비를 해야 하고, 연습을 잘 해놔도 잠깐만 다른 걸 하면 금세 잊어버리죠. 이것 말고는 아이들과 태권도를 하는 것에 다른 어려운 점은 없어요” 2010년부터 그가 코치를 맡고 있는 경은학교 선수단에는 인지능력이 4~5살 수준에서 멈춘 지적장애인이 많다. 경은학교는 장애인이 다니는 특수학교다.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 그리고 취업을 준비하는 학생들까지 모두 다닌다. 윤씨는 이곳에서 전교생에게 태권도를 가르치고 있다.
“아이들을 만나고 나서 제가 변했어요. 예전에는 할 줄 아는 게 이것뿐이니 일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이들과 오래 함께하고 싶어서 태권도를 가르치게 돼요.” 일반 아이들이 태권도를 더 빨리 배우고, 말도 더 잘 통하지만 윤씨는 경은학교 아이들과 대화를 하는 게 즐겁다. 남자 못지않은 키와 몸집, 큰 목소리를 가진 그이기에 아이들은 운동할 때 그를 호랑이 선생님으로 여기지만 평소엔 누구보다 가까운 친구다. “거짓 없이 다가오는 모습이 좋아요. 아이들과 대화가 되지 않아도 계속 말을 걸었더니 이제는 아이들이 먼저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어요. 장애인들은 일반인처럼 베스트 프렌드가 없는 경우가 많은데 인지능력이 되는 친구는 나한테 와서 상담을 하는 경우도 있어요.”
원래 장애에 대한 관심이 남달라 이곳에 있게 된 건 아니다. 대학 졸업 후 3년 동안 미국에서 태권도 사범으로 일했다. 하루는 평소와 다름없이 시범을 보이다가 무릎을 삐끗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다리를 움직일 수 없었다. 치료를 위해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고 6번의 수술과 2년여의 재활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리는 전과 같은 자유를 찾지 못했다. 다리와 함께 꿈도 꺾였다. ‘태권도를 한 다리로 어떻게 하겠나. 15년을 태권도랑 살았는데 이제 무얼 하지’ 막막했다. 그때 경은학교에서 제의가 왔다. 이곳에서 태권도를 처음 시도하려는데 같이 해보지 않겠냐고. “어떤 경험이든 좋고 필요한 거라는 걸 알게 됐어요. 태권도 선수 생활만 해서 이기는 것에만 집착하던 나였는데 미국에서 만난 사람들이 삶을 즐기고 여유롭게 사는 법을 가르쳐줬어요. 말을 몰라도 진심만 있으면 통한다는 것도 그때 배웠고요. 미국 생활을 거치고 또 제가 직접 아파봤기 때문에 지금 이 일을 만났을 때 선택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장애인를 가르치다 보면 여성의 모성애와 세심함이 필요할 때가 많더라고요. 신변 처리가 어려운 친구들을 도울 때나 관심과 소통이 필요할 때, 엄마의 마음으로 더 이해할 수 있고 살펴줄 수 있는 것 같아요.” 장애인태권도 코치는 여성이란 핸디캡도 장점으로 바꿔놓았다. ‘다시 태어나도 태권도 할 거야’ 서슴없이 말할 만큼 태권도를 좋아하지만 ‘여성’이란 조건은 태권도 전문인으로 살기에 유리한 조건은 아니었다. 하루 6시간 이상 운동하면서 체력적으로 힘들 때도 많았고, 여자로서의 삶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현역 태권도 선수들은 남자가 여자의 두 배 정도 더 많다.
최근 이런 마음이 커지게 된 두 가지 계기가 더 생겼다. 하나는 지난해 방송 프로그램 때문에 제자와 단둘이 여행을 했던 일, 다른 하나는 임신이다. “학교에서 직접 어머니들을 만날 일은 많지 않은데 방송을 하면서 학부모님과 깊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어요. 아이들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그때 이 길로 오길 정말 잘했다 생각했어요. 그리고 예전에는 친구 같은 마음이 컸는데 제가 엄마 준비를 하다 보니 지금은 엄마처럼 보듬는 마음이 더 커져가요.”
‘천릿길도 한 걸음씩’, 갈 길 멀어 설레
장애인태권도를 만나고부터 하고 싶은 일이 많아졌다. 아이들에게 태권체조를 가르치려고 댄스학원을 다녔고, 2011년에는 체육교육과 대학원 과정에 들어갔다. 졸업 후에는 특수교육을 공부해볼 생각이다. 지난 3월에는 세계장애인태권도연맹 여성분과위원으로도 활동을 시작했다. “장애인태권도를 활성화하려면 전문적인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태권도인들은 태권도 쪽으로는 대단하지만 장애 분야는 모르는 분들이 많거든요. 2004년 처음 미국으로 갔을 때, 태권도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을 도장으로 이끌고 태권도를 알리면서 뿌듯했던 것처럼 저부터 열심히 해서 장애인태권도를 활성화하는 데 일조할 수 있었으면 해요.”
제1회 전국장애인태권도선수권대회에는 전국에서 207명의 선수들이 출전했다. 수천이 모이는 일반 대회에 비하면 왜소한 규모지만 스타트를 끊은 만큼 절반은 이룬 셈. 대회장에 2012년 세계를 들썩이게 했던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울려퍼지자 윤현숙 코치의 우렁찬 구령 소리가 들렸다. 장애인태권도대회의 시작을 알리는 아이들의 축하공연은 힘차고 명랑했다. 그는 대회가 진행되는 내내 힘든 기색 없이 밝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