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대통령직속 여성특별위원장 지낸 윤후정 이화여대 명예총장
헌법에 양성평등 조항 넣고 남녀차별금지법 만들어… 사적·공적 생활에서의 성평등 실현 힘써

 

여성 의식화와 여성운동의 대중화, 여성학의 만개, 그리고 여성부 출범과 호주제 폐지. 한국의 여성발전사를 관통하는 굵은 줄기다. 이 역사적 맥락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윤후정(81·사진) 이화여대 명예총장이다. 그는 1998년 3월 김대중 정부와 함께 출범한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 초대 위원장으로서 여성부 탄생을 준비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에 앞서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헌법학자로서 80년 8차 개헌 당시 YWCA, 여성단체협의회, 여성유권자연맹 등 3개 여성단체의 요청에 따라 헌법 초안 작성에 참여, 헌법에 가족·혼인생활에서의 평등 조항을 삽입(현행 헌법 제36조 제1항)시킴으로써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법에 ‘여성’을 입히는 작업을 전개했다. 한편으론 70년대 후반 크리스챤아카데미를 중심으로 ‘여성사회연구회’를 발족시켜 초대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여성학의 태동을 준비했다. 당시 여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여성 정론지의 필요성이 대두됐고, 이에 핵심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여성신문’ 창간과도 인연이 깊다.

“남녀차별금지법은 한국 여성의 인권법”… 폐지 두고두고 아쉬워

이화학당 이사장직을 끝으로 모든 공직에서 은퇴했지만 최근까지도 그에겐 목촌법률상, 자랑스러운 이화인상 등 선구자적인 공로와 기여를 인정한 수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열여덟 살, 성년을 향해 가는 여성주간을 맞아 그와 자리를 마주했다. 

-최근 고위 공직자들의 일련의 성추문을 접하면서 초대 여특위원장 시절 제정한 ‘남녀차별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남녀차별금지법)이 2000년대 중반 폐기된 것을 아쉬워하는 이들이 많다.

“남녀차별금지법은, 내가 주도하긴 했지만, 한국 여성의 인권법이자 피해자의 ‘구제’까지 제시했다는 면에서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혁명적인 법이었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여성부가 여성가족부가 되면서 국가인권위원회로 업무가 일부 이관됐다고 폐지되다니 크게 잘못된 일이고, 두고두고 아쉽기만 하다. 당시 폐지 이유를 알아보다가 ‘차별’을 다룬다는 면에서 중복돼 폐지했다는 말을 듣고 너무 속상해서 오히려 신경을 안 쓰려고 노력했다. 같은 차별의 문제라도 여성 차별은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가부장적 전통에 근거한 오랜 관행이기에 일반적 인권 개념이나 일반적 차별에 대한 접근 방법과 해결 방법 면에서 다를 수밖에 없다.”

-험난한 과정을 통해 제정된 법이어서 더욱 안타깝다. 

“여성계와 연대해 헌법 초안에 양성평등 조항을 넣은 것이 사생활에서의 성차별을 해결할 법적 제도로 호주제 폐지의 근거를 마련했다면, 이 법은 여성들의 공공생활에서의 모든 차별을 금하고 있다. 특히 ‘성희롱’ 조항을 집어넣으면서 여기에 처음으로 (권력관계에 의한) ‘성차별’ 개념을 도입한 것이 의미가 깊다. 당시만 해도 남성 의원들이 성희롱의 문제는 개인 차원의 문제이지 법적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고 강하게 거부 반응을 보였고, 여특위가 법안 제안권이 없는 자문기구였기에 세 차례의 거절을 당하고 난 뒤에야 겨우 법안을 대표 발의할 국회의원을 섭외할 수 있었다. 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각 의원실을 돌며 당시 차명희 사무처장 등과 함께 국회에서 살다시피 했다. 법안 초안에 ‘시정명령권’을 넣었는데, 법사위에서 이를 삭제해야만 법안을 통과시키겠다고 해서 속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이를 ‘권고권’으로 바꾼 기억이 엊그제 같이 선명하다.”

-여특위가 있었기에 여성부 탄생이 가능했다고 본다. 초대 위원장으로서 가장 보람되게 회고하는 것은.

“남녀차별금지법 제정과 더불어 여성정책 주류화에 힘쓴 것이 기억에 남는다. 정부 각 부처에서 여성문제를 부수적인 것으로 처리해버리지 않도록 주요 6개 부처에 여성정책담당관실을 두고 서로 네트워킹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여특위원장 시절 고 김대중 대통령을 직접 만나 ‘여성부’를 빨리 출범시켜 달라고 요청했는데 ‘조금 더 두고보자, 여특위가 생긴 지 얼마 안 됐는데 지금 바로 여성부를 만들 수는 없지 않으냐’는 대통령의 말씀을 듣고 임기 내 여성부를 만들 의지가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후 1년여 임기를 마칠 때까지 여성부의 청사진 마련과 출범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무엇보다 여성부는 하나의 부서를 넘어 대한민국 여성 전체의 대변 창구라는 의식과 사명감이 철저해야 하며, 여성문제 해결은 성차별 문제 해결을 넘어 국가 경쟁력에 직결된다는 인식이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부는 대한민국 여성의 대변 창구…다른 부서와 다를 수밖에 없어”

-현재 여성이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라 보는가.

“내가 여성문제에 일생 관심을 갖고, 기회가 되면 역할을 한 것은 그동안은 주종관계에서 살았지만 이젠 여성 자신도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절박감에서다. 시중 드는 것이 아닌, 동반자적인 관계를 남성과 맺고 살아야 한다. 이제 여성 의식도 상당히 진전됐고, 외관상 생활 변화도 많지만 이건 초보적인 1차 단계에 불과하다. 2차 단계로는 아직 가지 못 했다고 말하고 싶다. ‘2차 단계’란 그동안 문제시돼 온 것들에 대한 개선이 현실화되는 것을 뜻한다. 가령, 여성의 공직 진출 기회는 많아졌지만 4급 이상 고위직 여성 비율은 턱없이 낮고, 여성 각료는 단지 2명뿐이며, 여성 국회의원 비율도 20%가 채 되지 않는다. 적어도 사회 각 분야에 여성이 30%는 돼야 ‘여성’의 목소리가 들릴 것이다. 지금은 ‘무엇’(what)이라는 목표보다는 ‘어떻게’(how)라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적극 모색해야 할 때다. 이 단계를 지나야 여성과 남성이 화합해 이뤄내는 상생의 사회, 통합사회로 가는 길이 열릴 것이다.”

-최근 여성학과가 개설 30주년을 맞았다. 소회가 각별할 것 같다.

“여성학과는 여성 의식화 문제에 크게 기여하는 한편, 여성학을 학문으로 정립시키며 큰일들을 해냈다. 그러나 이제 여성학과 자체도 제2단계로 새판을 짜 나가야 한다. 궁극적으론 ‘여성 삶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학문’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여성학을 자꾸 서구에서 도입했다고들 하는데, 사실은 여성학이야말로 한국적 토대 위에서 출발한 지극히 한국적이고 창의적인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74년 크리스챤아카데미 주최로 열린 ‘여성운동지도자협의회’ 세미나에서 ‘세계 여성의 해 선언과 한국 여성운동의 과제’를 주제로 강연을 했는데, 이를 계기로 새로운 여성관 형성과 함께 여성운동의 전환점을 만들자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이 한번으로 끝내지 말자는 요청이 이어졌다. 76년 ‘여성사회연구회’가 만들어졌고, 여기에 각 분야 연구자들과 여성 활동가들이 모여 정기적으로 한 달에 한 번 연구 발표 모임을 가졌다. 우리가 관심을 가진 것은 우리 역사에서 여성을 어떻게 보았는지, 여성이 어떤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어떻게 생활했는지 등으로, 한국 사회를 주요 타깃으로 해서 칠거지악 등 기존 가부장적 통념의 허실을 파고드는 것이었다. 이렇게 1년을 지내면서 여성문제가 학문화될 수 있다는 깨달음과 자신감을 가지게 됐고, 77년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에서 여성학을 교양과목으로 개설한 것을 시작으로 숱한 논의를 거쳐 1982년 대학원에 여성학과가 개설되기에 이르렀다.

개인적으론 79년 법정대학 학장으로 교무회의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이용해 여성학과 개설을 줄기차게 주장했다. 당시 여성문제에 진보적이라고 생각했던 교수들도 여성학을 교양과목으로 하는 것엔 이의가 없었으나 학과 개설로 이어지는 것엔 강하게 반대해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84년 한국여성학회가 창립돼 여성학의 연구 토대를 탄탄히 했고, 91년 총장 재직 때는 아시아여성학센터를 개설했다.

70년대 말 하버드대에서 ‘여성과 법학’ 강좌를 설치하는 등 서구에서도 우리가 여성학의 씨앗을 뿌릴 즈음에 여성학이 학문으로 정립돼 가고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한국에서의 여성학 태동은 빠르면 빨랐지 결코 뒤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주체적이고 공동체적인 삶 살기를

-성평등 사회를 향해 가는 후배들에게 조언을 주신다면.

“무엇보다 내가 주체적으로, 인간답게 살려면 주체적인 인간이 돼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 바란다. 그래서 사회생활도 해야 하고 역사적인 사건에 참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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