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연 ‘질경이’ 대표, “‘살림’의 전통을 무시하고는 행복할 수 없어요”
민중미술에서 출발해 생활한복 개척… ‘무봉헌’ 개관해 우리 의식주 문화 재조명

 

삼청동에 최근 개관한 생활문화원 무봉헌 을 배경으로 서있는 질경이 이기연 대표.sumatriptan patch http://sumatriptannow.com/patch sumatriptan patchfree prescription cards sporturfintl.com coupon for cialis
삼청동에 최근 개관한 생활문화원 '무봉헌' 을 배경으로 서있는 질경이 이기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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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효식 / 여성신문 사진기자 (yesphoto@womennews.co.kr)
“철학이 담긴 옷을 만든다.”

1980년대부터 생활한복을 개척해온 ㈜질경이우리옷(이하 질경이)의 대표 슬로건은 심상치 않게 야심만만하다. 2000년간 자연과 인간이 상생하며, 인간과 우주가 하나로 통해온 ‘살림’의 우리 옷 문화, 이를 통해 서구의 생태학적 세계관과 만나는 접합점을 만들겠다는 부연 설명에 이르러서는 ‘이 브랜드는 뭐지?’ 하는 호기심이 슬며시 일어난다. 서울 삼청동에 3월 개관한 질경이 생활문화원 ‘무봉헌’에서 이기연(55·사진) 대표를 만나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면서 막연한 궁금증이 점차 풀려갔다.

“머리로만 인문학 하던 시대 지났다”

… 올바른 오감 키워야

장인까지 동원해 6년의 기간을 거쳐 완성된 전통 한옥 ‘무봉헌’(서예가 황방연 선생이 신사임당의 시 ‘사친思親’에서 두 글자를 빌려 지은 당호로, 사람과 사람이 만나 흥겨워 춤을 추는 공간이란 은유적 의미를 담고 있다)은 이 대표와 질경이가 30년간 전개해온 우리 옷 입기 운동의 결정체다. 제대로 된 우리 문화를 대중에게 널리 알리고자 그를 주축으로 한 운동권 내 문화운동 그룹이 1984년 민족생활문화연구소를 설립했을 당시 핵심은 바로 우리 옷 사업단이었다. 이후 10여 년간 어깨에 멍이 들 정도로 원단을 둘러메고 다니며 디자인 한 생활한복을 팔고 대학로에서 흰 면티셔츠에 실크스크린으로 우리 문양을 그려 넣어주는 이벤트도 벌이면서 우리 옷 보급운동을 펼쳐왔다. 물론 그 자신의 디자인료와 공임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왜? 운동이었으니까. 무봉헌은 그 시절의 연장선상에서 지금의 트렌드에 맞게 벌이는 또 하나의 문화운동 본거지다.

“서구식으로 표현하자면 ‘살롱’과 같은 곳으로 만들고 싶다. 우리의 전통 의식주와 관련한 시음, 시식, 바느질 등의 체험과 더불어 그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을 주제로 한 강좌를 열고, 한편으론 다양한 분야의 신진 작가들의 전시회를 열고 그들의 작품을 질경이 매장에서 직접 판매하는 등 대중화의 통로 구실을 할 계획이다.”

그가 내놓은 전통차만 봐도 무봉헌의 각종 강좌가 평범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차 시음회에 내놓은 이 차는 일본식이 아닌 전통 한국식으로 만든 ‘덖음차’다. 무쇠솥에 기름을 전혀 두르지 않고 대나무 숲에서 야생으로 자란 차나무에서 따온 잎을 계속 솎아내며 볶는 과정을 통래 이파리의 수분을 증발시킨 후 멍석에 깔아 10여 차례 가깝게 말려 놓으면 생잎 상태 그대로 마른다. 후에 찻물을 따르면 이파리의 생생한 맛을 그대로 음미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때문에 기업식이 아닌 오직 수제방식으로만 생산이 가능한 차다. 그가 직접 참여한 생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덖음차의 올해 수확량은 딱 30통에 불과하다. 거의 매 주말 전라도 장성까지 내려가 수고한 결과물이다. 놀라는 기자에게 그는 “이 무봉헌에서 커피를 팔겠느냐, 와인을 팔겠느냐”며 “우리 몸을 살릴 수 있는 식재료를 얻기 위해 발효 최고 전문가, 자연음식 전문가, 귀농자 등이 매 주말 여기에 모여 공부하고, 한 달에 한 번 시도해 담근 음식들을 맛보고 평가하고 검증한다. 혓바닥이 갈라 터질 정도로 힘들지만 연말쯤이면 질경이만의 독특한 레시피가 개발될 것으로 기대한다”며 웃는다.

“전통을 특별히 지키겠다기보다 전통적 지혜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 상식적 삶을 살 수 없을 것이란 절박감이 더 크다. 여자와 남자가 만나도 아이가 생기기 힘들고, 육아도 자연스럽다기보다 계획을 치밀히 해야 하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 많이 생기는 현실을 볼 때 현재 우리 삶의 방식을 재고해봐야 하지 않을까. 자본주의 상업문화에 길들여지고 중독된 입맛과의 고리를 어떻게 끊을까. 정말 좋은 것을 맛보고 이를 통해 감각부터 바꿔나가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제, 머리로만 인문학을 하던 시대는 지났다.”

그는 민중미술운동의 개척자로 촉망받던 차세대 주자였다. 홍익대 미대(조소과) 졸업 후 본격적으로 시민운동에 뛰어들어 미술 동인 ‘두렁’을 만들고, 기존 화랑을 통한 유통 방식을 거부하고 대중과의 교차점을 찾기 위해 부단히 다양한 시도를 했다. 만화, 판화, 걸개그림은 물론 달력, 카드, 손수건, 옷 등 생활용품에 적극적으로 미술을 접목했다. 평론가 유홍준 교수에 의해 ‘80년대를 여는 20대 작가’에 홍일점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때의 대표작은 ‘더 이상 뒤로 물러설 곳이 없어요’. 두 사람이 누웠다 일어나면 다인 좁은 방에서 딱 방바닥 크기만 한 전지 한 장에 218명의 인간 군상을 그려 넣었다.

생활한복 수요 폭발적으로 늘었지만

복제 피해에 “빨갱이 옷” 음해도 당해

 

이기연 대표가 최근 디자인한 수묵화 저고리. 앞을 여미면 연꽃잎이 완성된다.cialis coupon cialis coupon cialis coupondosage for cialis site cialis prescription dos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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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질경이우리옷
“문익환 목사께서는 시를 짓기도 한 사건인데, 당시 노동운동으로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남편이 데모하다 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을 당한 후 감옥에 끌려가자 아이가 둘 딸린 아내가 ‘더 이상 뒤로 물러설 곳이 없다’고 절규한 얘기에서 주제를 잡았다. 우리나라 노동운동사의 축약사 같은 그림으로 자부하고 있는데, 그림 속 여주인공, 그 아내는 13세 때부터 공장생활을 했다고 한다. 나와 동갑내기라 더욱 애정이 갔다.”

그의 예술 인생 역시 절박감과 분투를 통해 얻어진 결과였다. 효령대군 17대 손으로 태어난 그는 4남매 중에서 가장 많이 집안 어른들의 기대를 받았다고 한다. 여자아이임에도 불구하고 이름에 ‘일어날 기’라는 남자 항렬을 전무후무하게 받았다. 그래서 자라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 “너는 사내아이로 태어나야 했어”란 말이었고,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남장을 하고 다녀야 했다. 스스로 ‘여성’ 정체성을 부인하고 그릇된 것으로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집안 어른들은 그의 법대 진학을 염두에 뒀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만난 미술교사 이주영 화백은 그의 삶을 바꿔놓았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시절 월북 화가 이쾌대에게 그림을 배운 스승은 경복궁을 주제로 한 미술대회에서 엉뚱하게도 휴지통을 그린 그의 재능을 단박에 알아보았다. 스승은 그의 소박한 그림을 명작처럼 칭찬해주면서 수년간 잠겨 있던 미술실 열쇠를 그에게 건네줌과 동시에 “미술을 선택해야 행복한 삶이 될 것”이란 확신도 함께 주었다. 스승의 가르침은 “정물화에서 상을 그리려면 상다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야 하고, 상다리를 제대로 그리려면 어떤 나무의 재질인지 알아야 한다. 또 그 나무가 어떤 숲에서 자랐는지도 알아야 한다”는 추상적인 것이지만 당시 그는 그 말이 가슴에 꽂혀 “선생님 말씀을 평생 안 잊을 사람은 나밖에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실제로 30여 년의 세월이 흐른 1997년 말에야 그는 스승을 버스정류장에서 배웅하다 “너는 내가 바라던 제자야”란 말을 꿈결같이 들었다. 그러나 정작 스승은 그가 가고 싶어 하던 홍대에 들어갈 수 있는 입시용 기술은 전혀 가르쳐 주지 않았다. 입시 석 달을 앞두고 “미대에 갈 것”이란 선전포고와 함께 어머니를 설득해 얻은 학원비로 난생 처음 미술학원의 문을 두드렸고, 결국 자신의 뜻을 이루었다. 

“화랑에 소속되기보다 화랑 밖으로, 거리로 뛰쳐나오는 시도를 한 건 예술 본질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사람의 삶과 역사, 내 주변과 지구, 그리고 이 우주의 관계와 의미는 무엇인가 등에 골몰했다. 내가 다니던 대학은 순수예술주의적 경향이 강해 사회의식이 상대적으로 빈약했다. 그래서 답답했다. 예술은 소수 기능인이 하는 것 이상의 훨씬 큰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술서적은 물론 금서가 된 경제·정치·사회학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고 선후배 여성 5명과 스터디그룹을 결성했다. 그러다가 경제사와 예술사가 한 맥락으로 관통하는 느낌을 받았다. 한마디로 개안하는 느낌이었다. 결정적 계기는 80년 광주항쟁과 함께 왔다. 예술가로서의 양심에 맞는 행보를 하고 싶었고, 위험한 데 몸을 던질 것이라 직감했다.”

5명의 스터디그룹을 중심으로 광주항쟁을 소재로 한 판화를 찍어 배포하면서 경찰과 숨바꼭질도 하고 구치소에 드나들기도 했다. 홍대에 탈춤반을 만들어 초대 회장을 역임한 그는 드라마센터에서 황석영 원작의 ‘장산곶매’ 마당극에 참여했다가 현재의 남편을 만났다. 서울대 탈춤반 출신의 남편은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창립 멤버로 고 김근태 의원과 함께 안기부 남영동 사무실에서 고문 취조를 받기도 했다. 그는 수차례 감옥을 가야 했던 남편은 물론 함께 운동하던 사람들의 뒷바라지까지 했다. 며칠간 밤새워 그린 노동의 대가로. 고 김근태 의원의 부인인 인재근 의원(민주당)과 함께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대변인으로 핵심 역할을 하기도 했다. 현재 민가협의 로고 역시 그의 손에서 나왔다.

“문화란 예술을 포함한 커다란 생활방식이라 생각해왔고, 사람의 삶을 바꾸는 예술로 가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계속 생활문화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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