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폭력은 범죄… 집안일을 사회문제로"

“남편은 매일 술을 먹고 들어옵니다. 문을 열어주면 그때부터 구타가 시작됩니다. 아침이 되면 손이 발이 되도록 빌지만 저녁이 되면 또 반복됩니다.”

남편에게 폭력을 당해도 아무에게도 얘기할 수 없고 가정폭력은 그저 ‘부끄러운 집안일’이었던 시절. "가정폭력은 범죄"라며 '집안일'을 사회문제로 끌어낸 한국여성의전화가 올해로 창립 30주년을 맞았다.

1983년 6월 11일 서울 중구의 한 옥탑방에 간판을 내건 여성의전화는 1대의 전화로 상담을 시작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요즘처럼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으로 정보 접근이 쉽지 않던 시절이었음에도 전국에서 걸려오는 전화로 한 달만에 541건의 상담이 접수됐다. 그렇게 가정 내에 은폐돼 있던 가정폭력은 사회문제화됐고 1997년 가정폭력방지법이 제정됨으로써 드디어 범죄로 처벌받게 됐다.

여성의전화는 1983년 ‘아내 구타’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며 최초의 가정폭력 실태 조사도 진행했다. 서울 지역 기혼 여성 708명을 대상으로 한 실태 조사에서는 42.2%의 여성이 남편에게 맞은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3년마다 여성가족부에서 이뤄지고 있는 ‘가정폭력 실태조사’에서 2010년 기혼 남녀의 부부 폭력률이 53.8%로 나타났고, 여전히 대다수의 가정폭력 피해자가 여성인 점을 고려한다면 ‘아내 구타’ 문제는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도 “30년 동안 달라진 점은 가정폭력 문제를 해결하는 시스템이 구축됐다는 것이지 상담의 사연은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하다”고 말한다.

가정폭력 피해자를 위한 쉼터도 여성의전화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다. 1986년 한 여성이 상처투성이 몸으로 아이 셋을 데리고 사무실로 찾아왔다. 남편에게 연탄집게로 맞아 머리가 찢어지고 담뱃불에 데인 채 제대로 치료도 못한 상태로 부산에서 상경한 여성은 전처 소생인 아이 둘까지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에게 남겨두지 못하고 데려왔다. 이 여성을 계기로 1987년 사무실을 개조해 2명 정도 잠을 잘 수 있는 긴급 피난처를 만든 것이 폭력 피해 여성을 위한 ‘쉼터’의 시작이 됐다.

1988년 성폭력 가해자의 혀를 잘라 자신을 방어한 변모씨 사건을 여론화해 무죄 판결을 받아내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후일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라는 영화로까지 제작됐다. 이어 1991년 장이 파열되고 임신 4개월인 태아를 사산할 정도로 구타하던 남편을 살해한 남모씨에 대해 대대적인 구명운동을 벌여 여성의 ‘자기 방어권’에 대해 문제제기해 왔다. 여성의전화 구명운동으로 남씨는 2심에서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풀려났지만 ‘무죄’ 판결을 받지는 못했다. 이후 여성의전화는 가정폭력 피해자의 ‘정당방위’를 주장하며 지원활동을 지속해오고 있다.

1990년대 성폭력특별법과 가정폭력특별법 제정의 견인차 역할을 하며 여성폭력 근절을 위한 제도화의 기틀을 마련한 여성의전화는 2000년대 들어 여성인권영화제 개최나 공익광고 제작, 애플리케이션 개발 등 보다 다양한 채널을 통해 대중과 만나려 하고 있다. 2006년 시작된 여성인권영화제 ‘피움’은 초기 여성인권 이슈로 소통하기 위한 수단에서 이제는 여성인권의식을 가진 영화인의 발굴·양성 등 영화제 자체로 내실과 외연을 넓혀가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춘숙 상임대표는 여성의전화 30주년을 맞으면서 “기쁘고 그동안 애쓴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고 소회를 밝혔다. 정 대표는 “앞으로 더 많은 여성들과 더 깊이 있게 소통하고 여성에 대한 폭력에 대해 이론적으로도 더 탄탄하게 하는 방법을 고민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여성의전화는 11일 오후 3시 서울시청 8층 다목적홀에서 창립 30주년 기념식과 기념 공연을 열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