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 설움 떨치고 4시즌 만에 LPGA 투어 우승
탄탄한 실력에도 동갑내기 박인비, 신지애에 가려 주목 못 받아
미국 여자프로골프(LPGA) 무대에 새로운 한국인 신데렐라가 등장했다. 국내에서조차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하던 이일희(25·볼빅)가 LPGA 투어 진출 4시즌 만에 생애 첫 우승을 차지했다.
이일희는 5월 27일(이하 한국시간) 바하마 파라다이스 아일랜드의 오션 클럽에서 12홀로 치러진 LPGA 투어 퓨어실크-바하마 클래식(총상금 130만 달러) 마지막 날 3라운드에서 5타를 줄이며 최종 합계 11언더파 126타로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경기 직후 이일희는 “꿈만 같다. 우승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며 “2010년과 2011년은 미국 무대에서 너무 힘든 시간을 보냈다. 스폰서 없는 투어 생활은 예상보다 더 힘들었다”고 감격스러워했다.
이일희의 우승은 ‘눈물 젖은 빵’으로 버틴 세월에 대한 보상이다. 그는 2006년 프로 전향 후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우승 없이 곧바로 미국행을 선택하는 파격을 감행했다. 2009년 퀄리파잉스쿨에서 20위에 오른 그는 2010년부터 LPGA 대회에 출전했다. 전문가들은 기본기가 탄탄한 스윙 자세와 샷 실력을 갖춘 이일희가 상위 랭크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2011년까지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다.
LPGA 투어 비용은 상당하다. 유명 선수들은 가족 또는 매니지먼트사 동료와 투어 대회를 함께 다닌다. 이일희는 홀로 투어 스케줄을 소화하는 ‘독립군’이었다. 이렇다 할 스폰서도 없고, 성적도 내지 못하니 경비를 충당할 방도가 없었다. 어떤 대회에서는 통장에 호텔비를 낼 만한 잔고조차 없었다. 제일 싼 이코노미석을 이용했고, 무료 민박으로 버텼다.
2011년에는 미국 생활이 너무 힘들어 국내 무대로 복귀하기 위해 KLPGA 투어 Q스쿨에 도전했다. 당연히 통과할 거라 여겼지만 떨어졌다. 인간만사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이를 악물고 2012년 시즌을 맞이했다. 메이저대회인 US오픈에서 공동 4위에 오르고 에비앙 마스터스에서 공동 9위를 차지하며 존재감을 알렸다. 지난 5월 6일 끝난 킹스밀 챔피언십에서 10언더파 274타로 공동 3위에 오르며 다음 대회 우승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그리고 마침내 이번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감격을 맛봤다.
‘88둥이’ 동갑내기 친구인 박인비(25·KB금융그룹), 신지애(25·미래에셋)의 승승장구를 말없이 지켜보며 남몰래 설움을 삼켰다. 이번 우승은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줬다. 우승상금 19만5000달러를 챙긴 이일희는 올 시즌 벌써 30만9000달러를 벌어 상금 랭킹이 37위에서 12위로 껑충 뛰어올랐다.
이일희의 가세로 한국여자골프는 또 한 명의 LPGA 투어 우승자를 보유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