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란 여성학자,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 후 17년 만에 ‘할머니'로서 육아서 펴내

너무나 바삐, 빠르게 변하는 세상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것이 있다면 아이를 키우는 것은 여전히 두렵고 힘든 일이라는 것이다. 스스로 “취업주부 4년, 전업주부 10년, 파트타임 주부 30년, 명랑할머니 7년”으로 자신의 경력을 정리하는 여성학자 박혜란씨가 펴낸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나무를 심는 사람들)은 늘 노심초사하는 엄마들을 향한 따뜻한 격려와 더불어 따끔한 조언이 가득하다. 한국 사회에서 보통의 여성이 거치는 거의 모든 과정을 다 거쳤기에 ‘박혜란 할머니가 젊은 부모들에게 주는 맘 편한 육아 이야기’라는 책의 부제는 그만큼 설득력이 있다.

책은 일종의 후속작이다. 저자가 그 흔한 과외 한 번 시키지 않고 맘 편하게 세 아들을 서울대에 쑥쑥 입학시킨 경험담을 책으로 펴낸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1996)의 연장선상에서 읽히기 때문이다.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가수 이적의 엄마로도 잘 알려져 있는 저자에겐 이적 외에도 건축학과 교수인 큰아들, 드라마 PD로 활발히 활동 중인 막내아들이 있고, 세 아들의 결혼을 통해 얻은 손자 셋, 손녀 셋(정말 평등하다!) 도합 6명의 손주가 있다. 게다가 ‘시월드’가 온갖 비난과 조롱거리로 전락한 요즘 세태에선 보기 드물게 세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손주들이 주말마다 우르르 그의 집으로 몰려들고 대가족 여행을 즐길 정도로 사랑받는 엄마, 시어머니, 할머니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한편으론 마냥 부럽고 한편으론 약간의 시샘도 느끼면서 새삼 그 비결이 궁금해진다.  

“만일 내가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먼저 아이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집은 나중에 세우리라”(다이애나 루먼스)는 인용구로 시작되는 책을 펼치는 순간 독자는 책이 기존 육아서의 통념과는 달라도 한참 다른 말을 할 것이라는 것을 예감한다. 한편으론 성숙한 엄마야말로 할머니가 돼서야 완성되는 게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도 든다. 저자는 “유전자의 힘은 놀라워서 손주들 얼굴에선 내 아이들의 얼굴이 보인다”며 “이 티 없는 얼굴을 보기만 해도 행복감에 벅차올라야 마땅했을 텐데 그걸 충분히 누리지 못했던 것 같아 가슴이 아려온다”고 고백한다. 오지도 않은 미래를 걱정하느라 느긋하게 아이 키우는 순간들을 즐기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아이 키우기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되돌아보게 한다. 저자의 말대로 2030 젊은 엄마들에겐 (저자처럼 후회를 하지 않으려면) “30년 후의 마음으로 아이를 키우라”는 조언은 정말 생뚱맞은 주문일까. “어떻게 아이를 키울 것인가는 결국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와 동떨어진 문제가 아니다”라며 “아이가 행복하기를 원하면 나부터 행복해져라”고 힘주어 말하는 저자가 말하는 좋은 엄마의 조건은 대략 9가지로 요약된다. 그러나 ‘아이의 존재 자체를 사랑하고 고맙게 생각한다’ ‘아이를 끝까지 믿어준다’ ‘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아이의 생각을 존중한다’ ‘아이를 자주 껴안아준다’ ‘아이와 노는 것을 즐긴다’ ‘아이에게 공동체의 룰을 가르친다’ ‘아이에게 짜증을 내지 않는다’ ‘아이에게 잔소리를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특히 공부하라는’ 등의 조항 중 자신 있게 ‘그렇다’고 답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몇 개나 될까.

반면 저자가 이제는 할머니가 되어 보다 근본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관점에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육아의 지혜는 의외로 단순 명료하다. 아이의 성적에 고민하는 엄마에겐 ‘아이가 공부 못하는 게 왜 엄마 탓인가’라는 문제 제기를, 아이의 적성 찾기에 몰두하는 엄마에겐 ‘기다려주는 부모가 되라’는 조언을, 아이가 어떤 친구를 사귈까 전전긍긍하는 엄마에겐 ‘나쁜 친구를 사귈까봐 겁내지 마라’는 안도감을, 아이의 창의성 기르기에 올인하는 엄마에겐 ‘창의력은 학원에서 길러지지 않는다’는 답을 제시한다. 저자 자신의 삶의 경험과 함께 수많은 엄마들을 접하며 얻은 취재 결과가 녹아 어우러진 결론이다.

그래도 저자의 아이 키우기 욕심은 끝이 없다.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세상에서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친환경 먹거리로 정성스레 식탁을 차려주고, 매일매일 자연을 접하게 해주며, 운동과 친해져 몸을 잘 쓸 수 있도록 하고, 잠자리에서 옛날이야기를 질리도록 들려줄 것이란다. 아이 키우기가 현재 진행형인 엄마들에겐 아직까진 기회가 열려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아이의 사교육 시점과 관련한 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중 만 1세라는 답변이 36%, 만 2세라는 답변이 27.1%였다고 한다. 상당수의 대한민국 아이들은 출생 이후 아주 짧은 유예 기간을 거쳐 20여 년을 엄마의 독려(?) 속에 학원을 순례하는 여정을 가는 것이 거의 필연이다. 엄마도 아이도 결코 행복할 수 없는 20년이다. 왜 고통을 자처할까.

저자는 “엄마들의 최대 불안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아이가 엄마를 잘못 만나서 제대로 피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라는 것이라며 “나중에 땅을 치며 후회하지 않기 위해” 불가피하게 다른 엄마들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대한민국 여자들 하나하나는 정말 똑똑하지만 일단 엄마가 되면 순식간에 바보가 되는 것 같아 “여자는 강하지만 엄마는 약하다”고 역설적인 결론을 내린다. 책이 ‘바보 엄마’로 살지 않기 위해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분투해온 대선배의 진심 어린 멘토링으로 읽히는 부분이다.   

“소파에 앉아서 아이를 내 무릎에 앉혔을 때 조그만 머리통이 내 턱을 간질이는 그 기분이 참 좋았다. 머리통으로 전해져 오는 온기가 서툰 가사노동에 시달린 나의 몸과 마음을 따스하게 덥혀주었다”는 회고에서 독자는 공감으로 가슴이 아려온다.

“아이가 내 뜻대로 된다고 자랑 말고, 아이가 내 뜻대로 안 된다고 걱정 마라. 반대로 아이가 내 뜻대로 된다면 걱정하고, 아이가 내 뜻대로 안 되면 안심하라. 가장 걱정해야 할 문제는 아이에게 뜻이 없다는 거다.”

아이의 눈망울을 들여다보는 순간 멈칫하며 가슴에 깊게 울린 말이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