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방 드라마엔 신데렐라, 캔디, 불륜, 출생의 비밀, 재벌 등 빠지면 절대 안 되는 몇 가지 흥행 공식이 있다. 그중 한 가지가 바로 ‘엄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엄마가 만들어내는 강렬한 모성 효과다. 여기엔 오로지 희생과 헌신만 하는 ‘착한’ 엄마와, 자식을 위해서라면 악의 불구덩이도 마다 않는 ‘나쁜’ 엄마, 두 가지의 전통적 유형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 이 엄마 공식이 기존 이분법적 구분을 넘어 다양하게 변하고 있다.
혼외 자식 당당히 한 가족으로 입적시키는 엄마들
아버지의 불륜으로 혼외 자식이 등장, 극의 주요 갈등을 야기했던 공식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지만 이젠 그 중심축이 엄마, 즉 여성으로 옮겨가고 있다.
대표적인 드라마가 MBC 주말드라마 ‘백년의 유산’(연출 주성우, 극본 구현숙). 요즘 전체 주말 프로그램 중 시청률 1위(26.5%·AGB닐슨미디어리서치·4월 27일 방송분)를 차지, 지난해 빅 히트한 ‘해를 품은 달’ 못잖게 ‘잭팟’ 매출을 터뜨리고 있다는 이 드라마에선 채원(유진)의 전남편 철규(최원영)가 재혼한 재벌가의 딸 홍주(심이영)의 심상치 않은 성장 배경이 단박에 눈길을 끌었다.
결혼 전 홍주가 철규에게 자신은 엄마가 외도를 해서 낳은 혼외 자식이라는 사실을 당당히 고백한 것. 때문에 집안의 수치이기에 결혼이라는 탈출구가 필요하다고 토로한다. 홍주가 재벌가의 호적에 공식 입적된 배경엔 숱한 바람을 피웠을 남편에 대한 홍주 생모의 반격일 것이란 설정이 암시된다.
SBS 일일드라마 ‘가족의 탄생’(연출 고흥식, 극본 김영인·김순옥)에선 미희(나영희)가 첫사랑과 사이에서 낳은 딸 수정(이소연)을 만난 후 이어진 행보가 눈길을 끈다. 미희는 마초적인 남편 진철(임채무)과 딸 예리(이채영)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수정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다. 이에 더해 진철을 때론 집요하게 설득하고 때론 이혼 협박을 하기도 하면서 끝내 수정을 가족관계등록부에 정식으로 올린다.
드라마가 사회현상의 반영이라고 전제할 때, 이처럼 드라마 속 여성들이 금기적 자기 주장까지 하게 된 이면엔 가정 내 여성들의 입지가 더욱 자주적이고 독립적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자식보다는 내 인생이 더 중요해”
SBS 주말드라마 ‘출생의 비밀’(극본 김규완, 연출 김종혁)에선 신세대 엄마가 등장한다. 아버지의 특별한 유전자를 이어받아 천재적 두뇌를 가진 이현(성유리)은 해리성 기억장애로 10년간의 기억을 날려버린다. 그 기간 엄마가 죽은 후 생부를 만나고, 미국 유학을 떠나고, 자살을 시도한다. 그 과정에서 만난 남자 경두(유준상)와 결혼해 아이도 낳지만 어느 순간 부분적으로 기억이 돌아와 자신을 되찾기 위해 갓난아기와 남편 곁을 홀연히 떠난다. 이현은 경두에게 “난 돌아오지 않을 거야”로 시작하는 편지를 통해 “제 배 아파 낳은 아기까지 버릴 수 있는 악독한 엄마를 절대 잊지 말고 복수하는 맘으로 살아줘요”라고 당부한다. 그의 마지막 말은 “나도 어디선가 악착같이 살려고요”다.
제작진은 “탄생하는 순간 아이가 뱃속의 기억을 모두 지우듯이 탄생 이후의 삶에 충실하기 위해 우리는 모두 기억을 해리한 채 태어난다”고 전제하며 해리성 기억장애를 앓는 주인공의 행복 퍼즐 맞추기에 무게를 둔다.
그런데 왜 주인공은 하필 여성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결혼과 출산에 대해 온통 기억을 지우려 했을까. 결혼과 출산이 여성의 새로운 자아 찾기에 걸림돌이란 것을 시사하고자 했을까.
‘애지중지’는 옛말… 스파르타식 자식 훈련
자식을 무조건 믿어주고 헌신적으로 밀어주는 맹목적인 엄마들의 시대는 확실히 저물고 있다. 최근 종영한 SBS 주말드라마 ‘돈의 화신‘(연출 유인, 극본 장영철·정경순)에서 외동딸 재인(황정음)을 스파르타식으로 훈련시킨 엄마 복 회장(김수미)의 전략은 같은 방송사의 주말드라마 ‘원더풀 마마’(연출 윤류해, 극본 박현주)로 이어질 듯하다. 시장 모퉁이에서 좌판 행상으로 억척스레 돈을 모아 백억 대 빌딩 소유주로 성공한 엄마 복희(배종옥)는 치매 진단을 받은 후 철없는 세 남매 길들이기에 돌입한다. 물질만능주의자인 자식들을 사람 한 번 만들어보겠다는 일념으로 투자건이 잘못돼 80억원을 날렸다는 시나리오를 짠다. 이 과정에 복희는 세 남매를 세부의 한 광산으로 데려가 “빌딩만으로는 상속세 때문에 너희들한테 돌아가는 게 너무 적다”며 그래서 “빌딩 팔고 광산에 다 투자했다. 열 번 두드려본 돌다리니까 걱정 말라”는 치밀한 설명까지 곁들인다. 후에 같은 사채업자에게 뺨을 호되게 맞는 연기까지 불사하면서 현실감각 제로인 자식들을 ‘멘붕’ 상태로 만든다.
제작진은 “청년백수, 캥거루족, 경제양극화, 개인파산, 황금만능주의, 외모지상주의 등의 부조리한 이슈를 경쾌하게 비틀어 인간관계와 가족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한다”고 기획 의도를 밝히고 있는데, 이 이슈 한가운데 선 엄마 복희의 역할에 관심이 쏠린다.
아직까지 드라마 속 엄마들의 변화는, 극 설정이 다소 충격적이더라도, 기존 아빠 역할을 대체하는 연장선상에서 읽힐 정도로 미온적이다. 한편으론 이 전복된 엄마의 역할을 이끌어내는 직접적 요인은 묘하게도 대부분 딸들이다. 반면 이상하게도 “난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딸과 엄마 간 특유의 복잡 미묘하고 애증적 관계의 본질은 애써 피해간다. 노르웨이 작가 게르드 브란튼베르그의 장편소설 ‘이갈리아의 딸들’은 출산 능력이 있는 여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남자이기에’ 숨죽여 살아야 하는 현실에 항거하는 한 소년을 주인공으로 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여성과 남성에 대한 통념과 역할이 전복된 상황을 읽어 내려가며 독자는 끊임없이 성 역할을 바꾸어 생각해보게 된다.
이처럼 거창하지는 않더라도 우리의 안방 드라마에 용기 있고 도전적이며 유쾌하고 건강한 엄마들이 자주 등장하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