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출=인격’ 공식에 ‘사람’ 대우 실종
욕설·성희롱에도 콜센터 상담원은 “사랑합니다 고객님”
1개월에 10회 넘는 야간근무에 간호사는 유산
사람이 죽었다. 매출 압박에 의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40대 여성은 스스로 생을 마감했고, 하루 10시간 가까이 서서 일하던 엄마 뱃속에서 아이는 세상 빛도 보지 못한 채 목숨을 잃었다. 인권도 죽었다. 항공기 승무원은 승객의 욕설과 폭행에 무방비로 당해야 했고, 콜센터 상담원은 수화기 너머 고객의 성희롱에도 실적 때문에 전화를 끊을 권리조차 없다. 장시간 노동과 야간노동, 감정노동과 성폭력에 내몰린 여성 노동자들의 삶은 여전히 비참하다.
4월 22일 낮 12시 30분께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 롯데백화점 청량리점 3층 화단에서 시신이 발견됐다. 백화점 휴무일인 이날 순찰 중이던 보안실 직원에게 발견된 이는 백화점 여성복 매장 매니저 김모(47)씨였다. 그는 전날 영업이 끝난 밤 10시쯤 백화점 7층 야외 테라스가든에서 난간 너머로 몸을 던졌다. 펜션사업 실패가 자살 원인이라는 백화점 관계자의 말이 보도됐지만 여론은 “백화점 측의 매출 압박 때문”이라는 유족과 동료들의 말에 더 무게를 둔다.
김씨는 지난 2월부터 한 여성복 매장 매니저로 백화점에 출근했다. 그의 직장은 백화점이었지만 협력업체 소속으로 백화점과는 철저한 ‘갑을’ 관계였다. 매장이 있는 4층을 관리하는 파트리더는 카카오톡에 매장 매니저 32명이 참여하는 대화방을 만들어 “오늘은 500이란 숫자를 가까이 하라. 시간별 매출 조회를 하라”며 매출 압박을 했다고 유족들은 주장한다. 실제 김씨는 사건 전날 “대리님(백화점 파트리더), 사람들 그만 괴롭히세요. 대표로 말씀드리고 힘들어서 저 떠납니다”라는 글을 남겼다.
롯데백화점 의류매장에서 근무한 전 매니저 A씨는 방송 인터뷰에서 “매출 압박이 들어오면 어쩔 수 없이 지인 카드까지 빌려 가매출을 찍는다. 매출이 없으면 산 물건을 가져가야 돼 빚이 된다”고 말했다. 가매출은 자신이나 가족의 카드를 사용해 허위로 매출을 늘리는 불공정 행위를 말한다. 협력업체 직원들은 매출의 일정 비율을 백화점에 수수료로 내야 하기 때문에 이런 악순환은 계속된다. 민주노총 전국민간서비스산업노동조합연맹은 “백화점 협력업체 직원들은 ‘매출이 곧 인격’이라는 자조적인 말로 자신의 처지를 표현하듯, 백화점이 요구하는 과도한 수익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가매출을 만드는 게 일상이 된지 오래”라며 “원청 기업의 영향력을 악용해 사람의 목숨까지도 저버리는 준살인행위를 멈추라”고 강력히 촉구했다.
비극은 제주의료원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지난 2009년 제주의료원 소속 간호사 중 임신부 15명 가운데 4명이 유산을 했다. 이듬해에도 11명 중 4명이 유산을 했고, 또 다른 4명은 선천성 심장 질환이 있는 아이를 낳았다. 2009년 전국 자연유산율이 20.3%인 데 비해, 제주의료원은 40%에 달했다. 유산한 간호사들은 임신 중에도 3교대로 하루 10시간 가까이 환자를 돌봐야 했다. 대체인력 부족이라는 이유로 암묵적인 ‘임신 순번제’도 강요받았다. 쉬는 시간은 단 10분, 그 시간 안에 식사도 마쳐야 하는 상황이 계속됐다. 건강한 사람도 감당하기 버거운 노동 현실은 10년 전부터 이어져왔다. 그리고 이는 병원 여성 노동자들 모두에게 해당하는 문제다.
최근 포스코 그룹의 한 임원이 여객기 안에서 승무원에게 수모를 주고 폭행한 사건은 감정노동자들의 서글픈 현실을 여실히 드러낸다. 손님에게서 비인격적인 대우를 받아도 감정노동자들은 항상 친절해야만 한다.
윤진영 희망연대노조 다산콜센터지부 사무국장은 지난달 29일 국회에서 열린 ‘웃음 때문에 침몰하는 감정노동자, 한국 노동자의 감정노동 실태와 개선 방향’ 토론회에서 콜센터 상담원의 실태를 여과 없이 들려줬다. 2년째 일하고 있는 한 상담원은 “콜센터 상담원들에게는 친절이 강요된다. 친절이 곧 점수이며 그 점수는 상담원의 월급으로 이어진다. 악성 민원인이라도 서울시청 홈페이지에 120 다산콜센터 상담원이 불친절하다고 글이라도 올리면 해당 상담원은 개인 실적 평가에서 점수가 차감이 된다”고 말했다. 다산콜센터의 한 외국어 상담원은 외국인 아내와의 부부관계 중 성적인 대화 내용을 그대로 통역해 달라는 요청을 거절했다가 욕설을 들어야만 했다. 이 남성은 악성 민원인으로 분류됐지만 악성 민원 관리자 중 베트남어 등을 구사하는 사람이 없어 또 다른 외국어 상담원이 성희롱과 욕설에 고스란히 시달려야 했다. 스트레스와 우울증에 시달리는 상담원들은 근무 1년을 채워 퇴직금이 모아질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퇴사만이 지옥에서 탈출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