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살리기에 나선 이광희 패션 디자이너

지난 2월 27일 남산 자신의 숍에서 만난 패션 디자이너 이광희(61)씨는 커트 머리에 낭랑한 목소리, 블랙 조끼에 체크무늬 짧은 스커트, 경쾌한 단화 차림의 만년 소녀 같은 모습이었다. 2009년 3월 배우 김혜자 월드비전 홍보대사와 우연한 기회에 아프리카 남수단 와랍주에 위치한 톤즈를 방문한 이후 톤즈에 몰입한 지 4년, 그동안 톤즈와 그,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벌어진 일들은 꿈같은 기적의 시간들이었다. 이름 앞에 으레 붙곤 하는 “영부인들이 사랑한” “상위 1%가 입는 옷을 디자인 하는” 디자이너라는 화려한 수식어와, 기아와 빈곤에 찌든 톤즈 한가운데 서 있는 그. 이 두 이미지 사이의 간극은 참으로 커 보였다. 그러나 그의 답은 의외로 단순 명쾌했다.

“하루 24시간 중 20시간을 톤즈 생각하며 지내요”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면에선 두 일이  똑같아요. 조대식 전 리비아 대사께서 일전에 ‘선생님이 지난 30년간 외모의 아름다움을 가꾸어왔다고 하면 지금 역시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다른 이들과 함께 내면의 아름다움을 만들어가는 일을 하시고 있잖아요’라고 멋지게 정리해주시더군요.(웃음)”

그는 2010년 ‘희망고’를 발족, 1년 전부터는 외교통상부 산하 사단법인체로 국제적이고 독자적인 비정부기구(NGO) 활동에 뛰어들었다. 패션 디자이너 30여 년 이력에서 얻은 몸으로 익힌 창조적인 감각을 가지고 여느 NGO 활동과는 차별화된 “즐거운” 구호 활동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자신감에서였다. 아프리카 하면 으레 떠오르는 눈물과 비극의 땅, 삶의 의지가 상실된 곳이란 이미지가 영 마음에 들지 않던 차였다. 거기 사는 이들도 나름 왜 기쁨이 없겠는가. 그동안의 후원 행사도 축제 콘셉트에 맞춰 기발하고 독특한 패션쇼와 흥겨운 콘서트 한마당으로 구성하곤 했다. 건기를 맞아 진짜 힘들어지는 3월 말엔 톤즈에서 문화축제를 한판 벌일 계획으로 벌써부터 몸과 마음이 바쁘다. 현지인들이 만든 공예품으로 전시회도 하고, 전통음악 연주에 맞춰 신명나게 춤도 추고 ‘미스 톤즈’도 선발할 계획이란다.

20년 넘게 지속된 내전과 기근으로 채소 한 뿌리조차 변변히 자라지 못하는, 세계에서 제일 힘든 지역 중 하나로 고 이태석 신부의 헌신으로 잘 알려진 톤즈.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씩씩한 엄마들을 만나고 망고나무를 알게 되고, 그리고 희망을 보았다고 한다. 2009년 첫 방문 때 우연히 만난 한 여성이 자신은 과부인데 망고나무를 길러 아이 셋을 키워냈다고 말한 게 단초가 됐다. ‘희망고’란 단체명도 ‘희망의 망고나무’와 이와 연계된 ‘희망의 북소리’를 뜻한다. 마케팅 전문가로 잘 알려진 남편 홍성태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의 작품이다. 건기 때 유일하게 무럭무럭 자라나는 망고나무는 심으면 5년 후 첫 열매를 맺게 되고, 이렇게 100년간 1년에 두 번씩 열매를 맺는다. 한 그루에 15달러 정도 하는 나무 한 그루가 온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그는 사비를 털어 100 가구에 망고나무 한 그루씩을 심어줬다. 이렇게 시작된 망고나무 심기가 이제는 3만여 그루를 훌쩍 넘어섰다.

특히 올해는 희망고에 있어 길이 기억될 만한 해다. 남수단 정부가 3만3057㎡(1만 평) 상당의 땅을 무상으로 원조해줘 지난해 11월 복합교육문화센터 ‘희망고 빌리지’ 건물을 완공했고, 올해 1월 센터가 본격 가동하기 시작했다. 센터에서는 아이부터 어른까지 마을 전 세대를 대상으로 탁아와 교육, 엄마 아빠의 기술과 직업 교육 등 톤즈의 부활을 위한 프로그램들이 차곡차곡 전개된다. 여기에 도서관, 급식소, 우물, 망고나무 묘목장 등 필수 시설이 들어서고 축구교실에 문화체험 교실까지 운영된다. 연간 1000여 명의 주민들이 애용하는 마을 중심지가 될 전망이다. 여기에 지난해 9월 우기 막바지에 희망고 빌리지 안 텃밭에 모험삼아 심어본 수박씨가 싹을 틔워 올해 초 7개의 수박을 수확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망고나무가 열매를 맺기까지는 5년 이상이 걸리고, 땅콩과 옥수수 외에는 어떤 작물도 쉽사리 자라지 않는 땅에서 가능성만이라도 확인해보고 싶은 조급한 심정에서 감행한 시도였다.

척박한 땅에서 자란 한국 수박, 이게 바로 기적

그는 그동안 구체적으로 NGO 활동에 참여해본 적도 없고, 자원봉사에 대해서도 거의 몸으로, 독학으로 익혀나가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예상 외의 수확을 거두고 있다. 불가사의한 일이다.

“어렸을 때부터 그런 마음, 그런 일에 자연스럽게 훈련이 돼 있는 것 같아요. 작고하신 아버지(이준묵 목사)와 어머니(김수덕 여사)는 한국전쟁 직후 해남에 전쟁고아들을 위한 ‘해남등대원’을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농민 기술교육을 위한 ‘삼애학교’, 양로원 ‘평화의 집’ 등을 세워 운영하며 평생 봉사의 삶을 사셨어요. 지금 등대원도 오빠가 퇴직 후 고향에 내려가 맡고 있어요. 특히 어머니는 늘 ‘선한 일을 절대 뒤로 미루지 말라’고 말씀하시곤 하셨죠. 이런 어머니 때문에 어떤 일이 닥치면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어머니라면 어떻게 했을까’ 한 번 더 생각하곤 하죠.”

“인생 멘토 엄마가 있었기에 할 수 있었다”

등대원에서 한 번에 200명이 넘는 아이들을 먹이고 씻기느라 그의 어머니는 조리사부터 청소부 역할까지 해내야 했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 아이들의 고픈 배를 채우려 자신의 밥그릇은 늘 가벼웠고, 그 때문인지 평생 몸무게는 40kg을 크게 넘지 못했다. 해남과 가까운 소록도에서 온 한센병 환자들이 일단 와서 몸과 마음을 쉬었다 가는 것도 어머니의 넉넉한 품 덕이었다. 정상의 패션 디자이너인 딸을 두었으면서도 늘 손수 지은 무명 한복을 고집하기도 했다. 그는 김용준 고려대 명예교수가 쓴 ‘내가 본 함석헌’의 책장 하나를 자랑스럽게 펼쳐보였다. 거기엔 함석헌 선생이 평생 존경한 여성이 둘 있는데, 한 명은 함 선생의 어머니이고, 또 다른 한 여성은 그의 어머니 김수덕 여사였다는 회고가 나왔다. 그는 말끝에 “난 어머니 감각의 100분의 1도 못 따라갈 거예요. 봉사는 물론이고 음식도 잘 하시고, 옷도 잘 만들어 입고, 게다가 인물까지 좋으셨어요”라고 덧붙였다.

“어머니 영향으로 90년대부터는 최상위층 고객들에게 어려운 이웃의 사정을 적극 알리면서 동참을 유도했어요. 많은 이들에게 관심을 갖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작게라도 할 수 있는 일이고, 씨앗을 뿌리는 근본적인 운동이라 생각했어요. 이렇게 해서 노인을 위한 데이케어의 개념도 거의 없었던 때 용산에 국내 1호라 할 수 있는 탁노소도 세웠죠. 일회성과 소모성을 벗어나 지속적인 도움을 주자는 것이 지금의 희망고로 이어졌다고도 볼 수 있어요.”

그는 화장품업체 더 페이스샵이나 여행가방업체 쌤소나이트 등의 기업에 ‘망고’를 주제로 한 희망고 라인을 개설해 일정 수익금을 톤즈를 위해 쓸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을 대표적 성과로 꼽는다. 자신의 브랜드에도 티셔츠나 소품 등에 좀 더 대중적인 가격의 희망고 라인을 개설, 수익금을 톤즈에 투입할 계획이다. “우리가 우리 손으로 번 돈으로 떳떳하게 도와주자”는 자신감이 대단하다.

“디자인 영감이오? 자연과 책, 그림과 음악 등을 접하며 얻곤 하죠.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의 평안입니다. 그래야 일상에서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과 마음가짐이 갖춰집니다. 눈에도 안 들어오고 마음으로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아무리 주변에 수많은 모티브가 있다 한들 큰 도움이 되겠어요?”

이희호 여사 등 역대 대통령 부인들과 가깝게 지내온 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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