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녀 국립창극단 예술감독 “요즘이 인생 최고의 전성기예요”

1월 22일 오후 장충동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사무실에서 만난 김성녀(63)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의 일성은 의욕과 도전으로 넘쳐났다. 사무실 한쪽 벽엔 지난 연말 국립창극단 창립 50년 만에 매진 행렬을 기록했다는 ‘배비장전’과 ‘장화홍련’ 만원 사례 티켓 봉투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지난해 3월 국립극장 산하 국립창극단의 예술감독으로 임명된 지 일 년도 채 안 돼 맺은 의미 있는 결실이다. 김 감독은 여성국극 스타 박옥진씨와 ‘춘향전’을 최초로 영화화한 김향씨 사이에서 태어나 엄마 뱃속에서부터 무대와 낯을 익히고 다섯 살 때 엄마와 함께 첫 무대를 밟았다. 이후 오랜 휴지기를 거쳐 20대 후반에 다시 무대로 돌아와 40여 년을 현역으로 뛰고 있다. 그는 성인이 돼 밟은 첫 무대가 전통 창극 무대였고, 이후 4년여를 안숙선 명창 등과 함께 주역으로 공연하며 연기자로서의 기본기를 다져온 이력을 들어 “연극배우지만 창극 화두와 평생 얽혀 있었기에 지금의 중간 성과는 1년 단기가 아닌 그동안의 준비가 차곡차곡 쌓인 결과물”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남편은 한국의 대표적인 연출가이자 연극배우인 손진책씨다. 그는 “어느 날 남편이 내가 인터뷰하는 내용을 우연히 듣더니 ‘어떻게 넌 입만 열면 네 자랑만 하느냐’고 어이없어 하더군요. 그러나 남편이 잘못 알았어요. 그건 자랑이 아니라 그동안 피땀 흘려 노력해온 결과에 대한 나 스스로의 행복감의 표현이에요”라고 당당히 말했다. 그의 행복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보았다.

창극 전형 90% 버리는 실험도… “논란을 즐기는 중”

그는 요즘 “논란과 주목을 즐기는 중”이라고 한다. 이제까지 언론도, 대중도 창극에 이런 눈길을 보낸 적이 별로 없어 절로 신이 난단다. 지난해 11월 공연된 ‘장화홍련’은 한태숙씨의 연출로 감각적인 스릴러 창극을 표방, 여러 가지 파격적인 장치를 시도했다. 가령 1500개 전체 객석 중 절반을 무대로 과감히 이동, 객석이 장화와 홍련이 수장된 호수로 변신했다. 창자(唱者)의 발림(몸짓과 손짓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것) 대신 현대적 몸짓을 삽입하고 샤워 신까지 등장하는 등 창극의 전형성을 90% 이상 포기한 극에 대해 “어떤 관객은 창극에 대한 새로운 도전으로, 어떤 관객은 ‘이게 뭐야?’라고 비난할 것을 단단히 각오했지만, 그런 호기심 자체가 발전이라고 생각한다”는 게 감독의 변이다. 올해 상반기에도 새로운 시도는 멈추지 않는다. 첫 무대 ‘서편제’(3월 26~31일)는 한국 창작 뮤지컬의 대부 윤호진 감독이 연출하고 재일동포 작곡가 양방언씨의 작곡을 통해 소리를 찾아나선 남매의 기구한 운명을 새롭게 담아낸다. 반면 ‘메디아’(5월 21~26일)는 연극계의 파워 콤비 서재형 연출가와 한아름 극작가의 손을 거쳐 서양의 대표 비극을 한국의 창극으로 흡수하는 도발적 실험이다. 

“6월엔 최초로 시도되는 청소년 창극 ‘내 이름은 오동구’를 선보입니다. 소리꾼 이자람과 콤비를 이뤄 (독일 작가 브레히트의 ‘억척어멈과 그의 자식들’을 판소리로 엮은) ‘억척가’를 대히트 시킨 남인우 연출가의 손길로 만들어지죠. 내년 초엔 세계적인 연출가 안드레이 서번 컬럼비아대 교수가 우리 창극 ‘흥부가’를 세계적인 문화 코드로 재탄생시킬 겁니다. 취임 초기 기자들에게서 창극은 보기 힘들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일단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했어요. 내 전략은 이렇습니다. 창극의 전통 원바탕은 해외 명장에게 맡겨 해외로 창극이 나가는 물꼬를 트고, 반면 세계적 명작은 우리 식으로 해석해내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현대와 전통이 맛깔나게 얽히도록 할 생각입니다. 어쨌든 50년간 정체돼 왔던 창극을 여기저기 들쑤셔보면 보물도 나오고, 먼지와 쓰레기도 나오겠죠. 이런 과정을 통해 탄탄히 정비한다면 우리 창극이라고 K팝처럼 K창극이 되지 말란 법이 있겠어요?”

그는 “관객의 다양한 입맛에 맞출 수 있어야 창극이 산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뮤지컬 연극 클래식 관객을 통합적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설명이다. ‘서편제’만 해도 득음의 스토리텔링이기에 전형적인 창극의 소재인데도 불구하고 열악한 경쟁구도에서 영화와 뮤지컬이란 타 장르에 선수를 빼앗겼다는 아쉬움도 표한다.

“공연이 최우선… 엄마와 주부 역할 포기했다”

“다행인 것은 연극계의 내로라하는 연출가들이 나의 이런 의견에 동의해 창극을 지원하려 기꺼이 와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최고의 연출가들이야말로 관객을 깨우는 핵이죠. 혹자는 그렇게 요청했는데도 꿈쩍도 안 하던 그들이 왜 지금은 몰려오느냐고 묻지만, 연출가들은 김성녀 개인이 좋은 것이 아니라 내가 요구하는 것과 자신들이 생각하는 게 맞아떨어지기에 동참해주는 거죠.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우리 전통을 익혀 창극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최고의 연출가가 내 남편이기에 합류시킬 수 없다는 점이죠(웃음). 손진책씨는 창극의 다섯 바탕을 다 북으로 칠 수 있고, 마당극도 만들고 탈춤도 인간문화재에게 사사했는데….”

그는 극단 민예극장의 ‘한네의 승천’을 통해 1976년 연출가 손진책씨를 만나 결혼에 이르렀다. 남편 손씨는 손봉호 서울대 명예교수, 손봉숙 전 의원 등 교수만 10여 명에 이르는 전형적인 학자 집안 태생이다.

“서양은 오페라와 뮤지컬이 갈려 있지만, 우리네 전통 연극은 춤과 노래, 연기가 다 들어 있는 종합 음악극이죠.  ‘한네의 승천’은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극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서 발전한 것이 바로 마당극입니다. 전통 창극을 바탕으로 현대화한 마당극을 30여 년 하면서 우리 전통놀이를 극화하는 작업에 전념해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남편은 내 재능에 지적 능력을 갖추게끔 지원해준 조언자예요. 그가 있었기에 내가 가진 기술이 예술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사과 깎기 대회가 있다면 아마 남편이 일등을 했을 거예요(웃음). 평생 내게 주부 역할을 요구하지 않고 알아서 스스로 해결하곤 했어요. 지금도 피곤하면 공연이 먼저니 아무 것도 안 한다고 선언하곤 하죠(웃음).”

그의 아들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조연출가로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고, 딸은 뮤지컬 배우로 잘 알려진 손지원씨다. 1990년대 여성신문의 열린 음악회 초창기에 무대에 올라 딸과 함께 ‘플란더스의 개’를 열창하던 그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하는 독자들이 많다. 지원씨는 지난해부터 몽골에서 아이들에게 음악치료 봉사를 하고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30대 후반에 접어드니 뮤지컬로 몸을 다 태우고 재가 된 상태라며 남을 돕는 행복감이 무대 위 박수보다 더 좋다”고 해서 말리지 못했다고 한다.

“대기만성, 얼마나 멋진 말인지!… 아직도 개미처럼 올라가는 중”

그런데 그가 꼽는 자신의 장점은 “한 우물을 파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 우물만 파서 최고가 되라? 이건 예전 교훈이죠. 가령 판소리를 내가 아무리 노력한들 안숙선 선생님만큼 잘할 수 있겠어요? 지금은 멀티 플레이어 시대, 연극과 소리를 다 잘하는 종합예술가를 지향하고 있죠. 돌아가신 장민호 선생께서 예전에 ‘성녀야, 이젠 다른 것 그만하고 연극만 해’라고 하셨지만요.(웃음)”

그는 사스(SARS)로 병원에 다니면서도, 팔이 부러지고 갈비뼈에 금이 갔어도, 발톱이 뽑혔어도 무대를 포기한 적이 없다. 이 독기를 ‘쟁이 정신’이라 말하는 그는 “세상 모든 일이 열심히 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고, 재능만으로도 다 되는 게 아닌데, 열심히 할 수 있는 품성과 주목이 가능한 재능을 준 부모님께 아직도 정말 고맙다”고 목이 메어 말했다.

부지런함을 타고난 그는 한시도 “멍 때리고” 있는 상태를 참지 못한다. 그래서 시작한 뜨개질, 퀼트 등도 타고난 천성 때문에 취미를 넘어 일이 돼버렸다. 그의 뜨개질 첫 책(두 번째 책은 9월쯤 출간될 예정이란다) ‘배우 김성녀의 일곱 가지 마음이 담긴 따뜻한 손뜨개’를 딱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