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세울 때마다 다시 정상에 오르는 기분입니다”
“히말라야에 16개 휴먼스쿨 세울 것”… 제2의 인생 순항 중

 

“히말라야 8000m 16좌 완등을 세계 최초로 이뤄낸 후 제겐 또다시 새로운 꿈이 생겼습니다. 히말라야가 내게 16번이나 정상의 자리를 허락한 보답으로 그곳에 사는 아이들을 위해 16개의 휴먼스쿨을 짓는 것 말입니다. 1년에 1개씩 짓는 것이 목표인데, 지금까지 이 계획대로 순항 중입니다. 2010년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해발 4060m)에 세워진 팡보체 초등학교를 시작으로 최근 2월까지 세 번째 휴먼스쿨 룸비니 학교에 이어 (안나푸르나 트래킹 지역으로 유명한 네팔 북쪽 카스키 지역의) 네 번째 학교의 기공식을 마쳤으니까요.”

소탈하고 밝은 인상의 산악인 엄홍길(52·사진)씨를 만나 얘기를 나눌수록 경외 섞인 부러움이 커졌다. 1985년 스물다섯 살에 에베레스트 등정을 위해 네팔에 첫발을 내디딘 이후 22년에 걸쳐 로체샤르를 끝으로 마흔일곱 한창 나이에 히말라야 16좌 완등이란 대기록을 세웠다면, 더 이상 원대한 꿈은 없을 듯하다. 그런데도 이에 멈추지 않고 한층 성숙해진 여유로움 속에 ‘사람의 산’이란 근사한 목표를 세우고 여기에 히말라야를 향한 열정 못지않은 애정을 쏟아 붓고 열매를 맺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2007년 세계 첫 16좌 완등 후 ‘엄홍길휴먼재단’ 설립

“히말라야에 학교를 세우고 문을 열 때마다 마치 정상에 오른 듯한 기분을 느끼며 다시 새로운 정상을 꿈꾸곤 하죠. 이 사람의 산을 오르는 일은 8000m 고산에 오르는 일에 비해 결코 녹록지 않습니다. 그건 바로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죠. 학교를 지어가면서 인연이란 게 좋은 생각, 좋은 뜻과 연결됨을 새삼 실감했어요.”

그의 제2의 꿈은 한 시상식장에서 구체화됐다. 2007년 말 파라다이스그룹이 수여하는 특별공로상을 받고, 각종 세금을 공제한 상금 4000만원이 ‘엄홍길휴먼재단’ 설립의 종잣돈이 됐다. 상을 받으며 “아, 이게 이것저것 생각 말고 재단을 빨리 시작하라는 계시구나”라고 느끼는 순간 그는 어느새 수상 소감을 통해 “이건 개인의 상도, 상금도 아니”라며 오랫동안 막연히 품어오던 재단 설립의 꿈을 설명하고 있었다. 이윽고 2008년 5월 재단을 발족하고 상임이사 자리를 맡아 네팔에 학교 짓는 일의 전면에 서게 됐다.

그의 휴먼스쿨들은 지형과 여건에 맞게 지어져 현지에서의 호응이 대단하다. 입소문을 탄 명성 덕분에 일개 초등학교 개교식에 교육부 장관, 국회의원이 헬리콥터를 타고 참석해 축하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한다. 고지의 식수 공급을 위해 멀리서부터 파이프를 끌어와 물탱크를 설치해 마을 주민들도 함께 이용하게 하고, 수세식 화장실을 설치하는가 하면 장관 집무실에 있는 컴퓨터보다도 더 좋은 컴퓨터가 비치돼 있는 그런 학교야말로 네팔인들에겐 “천지개벽할 일”이다. 여기에 도서관, 놀이터는 물론 마을회관까지 함께 지어주니 지역공동체의 구심점 역할까지 하게 된다.

“보통 네팔의 학교 창문들은 신문의 4분의 1 크기 정도로 작아요. 이 때문에 햇빛도 안 들어오고 환기도 잘 안 되죠. 우린 학교 지을 때 무조건 창문을 키우라고 해요. 아이들이 장엄한 자연환경을 바라보면서 공부할 수 있도록 말이죠.”

학교에 대한 그의 자부심은 끝이 없다. 1986년 그와 함께 에베레스트를 오르다 숨진 셰르파 술딤 도르지를 기리기 위해 도르지의 어머니와 아내가 살고 있는 팡보체에 세운 첫 번째 휴먼스쿨은 고산 특유의 찬 공기를 감안해 창문을 한껏 키우면서 벽과 벽 사이에 단열재를 넣어 천장부터 바닥까지 온기를 주려 애썼다. 세 번째 학교인 룸비니의 경우엔 덥고 비가 많이 오는 평야지대인 점을 고려해 침수를 막기 위해 바닥에서 70㎝ 올라간 곳서부터 기초를 닦고, 햇볕이 들이치지 않도록 처마를 다른 곳보다 두 배 정도 더 넓게 했다. 이런 식으로 정성을 기울이다보니 학교당 2억~3억원가량의 건축비가 들어간다. 휴먼스쿨은 코이카(KOICA·한국국제협력단), 밀레(등산 아웃도어 업체), 자원봉사와 개인의 기부금 등으로 이뤄낸 기적이다.   

히말라야에 묻은 동료 10명 이름 주문처럼 외며 늘 기억

이처럼 꿈을 실현해가는 과정은 참으로 아름답지만, 그 이면엔 자신의 산악 인생을 통해 동료 10명과 등정을 함께한 가족 같은 셰르파를 잃은 참혹한 슬픔이 있다. 급기야 지난해엔 로체와 안나푸르나에 ‘코리안 루트’를 개척하러 떠났던 친동생 같은 박영석 대장까지 잃었다. 그가 동료 3명의 희생과 발목이 180도 돌아가는 부상을 딛고 4전5기 끝에 등정에 성공한 안나푸르나에서였다. 최근 그는 박 대장을 비롯해 그의 등정 인생을 함께한 이들과의 인연을 풀어낸 ‘내 가슴에 묻은 별’(중앙books)을 출간했다. 마지막 책장을 넘기기까지 가장 궁금했던 것은 그는 어떻게 이 상실의 기억으로부터 탈출해 스스로를 치유해나갈까 하는 것이었다.

“동료들의 사고 당시부터 고통은 이미 시작된 거죠…. 한시도 그들을 잊어본 적이 없어요. 그들의 이름을 평상시에 주문처럼 외우고 다니죠. 그럴 때마다 그들과 시작된 인연, 생사고락의 나날들, 그리고 죽음 직전까지 같이했던 일들이 기억나곤 하죠. 히말라야 고봉을 서른 여덟 번이나 오르내리면서 쓰라린 패배와 고통부터 경험했죠.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당시의 역경들이 오히려 그 이후의 실패를 극복하게 도와주었더라고요. 위기가 닥칠 때마다 지금 이 순간은 전의 고통에 비해 아무 것도 아니다, 성공하려면 이런 과정을 다 겪어야 한다고 되뇌곤 했죠. 또 사고가 나도 이것은 큰일을 이루기 위한 액땜이라고 애써 자위하곤 했어요. 8000m는 그냥 올라가는 게 아니니, 두려워도 이겨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죠.” 

그에게 평안을 준 것은 종교였다. 우리나라 산을 오를 때마다 마주친 절, 그리고 셰르파들에겐 절대적인 라마불교의 영향으로 그 역시 불교신자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연’이란 초연한 세계다.

“산자락을 다 넘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며 인간 본연의 초라함을 절감하곤 합니다. 산과 대면하는 순간 느끼는 것은 오로지 ‘난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거예요. 산과 내가 하나 되는 순간에만 등정이 가능할 뿐 자연이 나를 거부하면 결국 등정을 할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닫곤 하죠.”

그에게 여성 산악인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함께 걸어가는 동지”일 뿐 성별 구분이 구태여 필요치 않은 존재다. 해외 원정 시 한두 달 텐트를 함께 쓰면서도 불편을 느낀 적이 없을 정도다. 그중 그에게 가장 특별한 존재는 1993년 한국 여성 최초로 에베레스트에 올랐던 고 지현옥씨. 그는 “여성 산악인의 등반사가 오래 되지 않았고, 활동도 뒤처진 상태지만 지현옥은 잘 받쳐주기만 하면 나중엔 저 혼자서도 충분히 잘 해내겠다”고 내심 기대했었다. 그러나 지씨는 산악인으로 한창 무르익을 시기인 1999년 그와 함께 안나푸르나 등정에 나섰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이 사고는 2002년 한국여성산악회 발족의 계기가 됐을 만큼 산악인들은 당시 지씨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그 역시 “그때 현옥이가 사고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세계 등반사상 여성의 히말라야 14좌 완등이 훨씬 앞당겨졌을 것”이라며 지금도 못내 아쉬워한다. 지씨 이후엔 단연 오은선씨다. 그에 앞서 14좌 완등을 눈앞에 두고 등반 중 사망한 고 고미영과 오씨의 자매애는 마치 그와 고 박영석의 형제애와도 닮아 있다. 오씨의 14좌 완등을 이끌어낸 것은 작은 체구에서 넘쳐나는 당찬 자신감이라고 인정한 그이기에, 이후 벌어진 오씨의 14좌 완등 논란이 더욱 가슴 아프다.

오은선 14좌 완등 논란 안타까워 “다시 올라갔더라면 좋았을 텐데”

“모든 것엔 기회와 타이밍이란 게 있습니다. 논란 당시 은선이가 ‘그래? 정 그렇다면 다시 가겠다’ 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워요. 나도 그런 쪽으로 은선이에게 충고도 해봤는데, 직접 등정을 한 본인이 14좌 완등을 자신하는데 왈가불가할 게 뭐 있겠어요? 어쨌든 최종적으론 본인의 생각과 결정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죠. 지금으로선 이미 타이밍을 놓쳤고.”

이런 모든 영광과 상처를 딛고 산을 타는 그의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다. 세살 때부터 원도봉산 자락을 오르내리며 미치도록 산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산에 오르지 않으면 나는 내가 아닌 것”이라 단언한다. 의외로 그의 아내는 산에 대해선 전혀 모른다고 한다. 그러나 “산에 가는 것이 직업”이고 “여기에 미치는 열정”을 이해해준다. 이런 아내 덕분에 그의 산악 인생이 가능했고, 이는 산악인들 사이에서 상당히 특이한 경우로 꼽힌다.

“산을 오르는 것은 목숨을 담보하는 행위죠. 입산하는 그 순간엔 산 아래 속세를 다 잊고 잡념이 없어야 해요. 가족까지도 잊어버리죠.”

요즘 그는 자신이 사는 서울 강북구에서 구청과 함께 청소년 등산교실을 시작했다. 14일 11개 중학교 50명의 학생들과 북한산 백운대를 함께 등반하며 얘기를 나누는 것으로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청소년 희망원정대’. 전국으로 활동을 넓혀갈 계획이다.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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