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 가진 자연인? 여성폭력 정당화하는 ‘선택’일 뿐

최근 젠더 전문가들에겐 시급히 대처해야 할 젠더이슈 하나가 생겼다. 소위 정봉주 전 의원의 석방을 촉구하는 ‘비키니 시위’에 대한 나꼼수 멤버들의 성적 언동을 둘러싼 성희롱 논란의 여파 때문이다. 당장 대학교, 공무원 연수원, 각종 사회단체에서 진행될 성평등 교육을 담당해야 할 강사들에겐 교육 현장에서 제기될 질문에 대한 대비가 시급해졌다.

“여성들의 비키니 시위가 발랄하고 통쾌한 정치적 표현의 자유라던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섹시한 동지도 가능한가요?” “‘욕망을 가진 자연인’ 남성이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보는 것은 당연한 거 아닌가요?” “풍자와 유머의 ‘난장’에서 페미니즘은 어울리지 않아요. 그럼 내분이 생겨 재미없어지고, 진보에도 문제가 생기니까요!” 이러한 복잡한 문제를 여기서 다 풀 수는 없다. 그러나 앞으로의 교육을 위해 몇 가지 방향은 잡아두어야 할 것 같다.

우선 여성들의 비키니 시위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입장은 비판적 지지부터 반대까지 다양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 비키니 시위 자체를 문제 삼는 페미니스트는 없다. 이슈는 맥락이다. 최근 들어 세계적으로도 여성들의 맨몸 노출이 주류 언론의 관심을 끌기 위한 사회운동의 한 전술로 동원되고 있지만, 그들의 메시지 전달이 성공적이었는지에 대해선 논란의 여지가 많다. 가부장적 문화의 성적 코드를 사용해 남성들의 시선 끌기에 효과적인 여성의 몸에 정치적 메시지를 싣는 전략에 대해 페미니스트들은 ‘여성들의 몸은 보여지기 위한 것’이라는 메시지만 전달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

둘째, 그들은 ‘섹시한 여성 동지’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한 언론학자의 말대로 나꼼수의 놀이공간이 ‘공론의 장’이 아닌 떠들썩한 저잣거리나 선술집의 ‘난장’이라니, 세속적 질서와는 다른 수평적 관계가 그 공간 속에서 일시적으로나마 가능하다고 치자. 그러나 현실세계에서 모든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착각)처럼 고상한 눈으로 여성을 대하지 않는다는 점은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욕망을 가진 자연인’에 대한 언급은, 자신이 더 이상 인간이 아니고 남성호르몬에 의해 작동되는 ‘기계’라는 선언이다. 자신이 인간이 아닌데, 상대는 인간일 수 있을까? 여성을 보면 욕망이 생기고 성적 농담을 하고 싶어지는 것이 ‘자연(nature)’이라고 믿는 것은, 여성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남성들의 의식적 ‘선택’이다.

마지막으로 여성 몸의 대상화에 대한 비판이 곧바로 페미니즘에 대한 분노·혼란·경멸로 이어지는 담론 현상이다. 비키니 대열에 합류하면 진정한 진보라 치켜세우고, 이에 반대하면 ‘꼴페미’들이 운동을 분열시키고 비생산적인 논쟁을 야기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것은, 여성운동의 분열을 시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대부분 여성주의자들이 남성을 혐오하고 있다는 착각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남성적 특권을 반성하라’는 규범적 진술은 남성집단 전체를 싸잡아 비난하는 것과 다르다. 분리주의 페미니스트들도 남성혐오주의를 표방하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여성주의자들은 본질적으로 여성적·남성적인 것이 따로 있다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비판할 뿐이다. ‘나꼼수 멤버들과의 관계는 언제나 우호적’이라는 공지영의 발언도 이러한 맥락이 아닐까?

나꼼수 멤버들이 ‘차이’를 좀 더 깊게 사유할 수 있었다면 여성 지지자들의 비판을 놀이 속으로 끌어들이고 판을 좀 더 크고 신명나게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깨진 기대와 희망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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