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작가들의 가능성, 시민과 함께 키울 겁니다”
페미니스트 비평가로 독보적 위치… 청장년 작가 육성 ‘중간허리전’에 역점
“‘미술계 우먼파워 시대’란 말, 가부장적 발상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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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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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효식 / 여성신문 사진기자 yesphoto@womennews.co.kr
서울시립미술관장으로 임명된 지 한 달여, 김홍희(64·사진) 신임 관장의 행보가 범상치 않다. 지난 2일 기자들이 빼곡히 모인 취임 기자회견에서 그는 고흐, 샤갈, 앤디 워홀 등 세계적 작가들의 블록버스터급 전시회를 가급적 지양하고 청년·중견 작가 지원에 방점을 둔 기획전 ‘중간허리전’에 주력하겠다고 밝혔다. 바로 다음 날, 페미니스트 미술평론가로 출발한 저력과 내공으로 주류 미술계의 흐름을 주도하는 저력을 발휘하고 있는 그를 만나 30여 년에 걸친 그와 미술과의 인연을 들어보았다.

“언니가 서울시립미술관으로 돌아왔다” 기대 답지

그의 이번 임명 소식에 지인들은 “언니가 서울시립미술관으로 돌아왔다”는 취임 축하 메시지에 기대를 담뿍 담아 보냈다(그는 초대 경기도립미술관장 시절, 나혜석·윤석남 두 작가를 축으로 하여 근대 한국 여성 작가들의 정체성과 지형도를 보여주는 ‘언니가 돌아왔다’ 기획 전시를 한 바 있다).

“앞으로 이 같은 여성 작가전을 아시아 글로벌 전시회로 확장해 우리나라 여성미술의 정체성을 파악하고 세계사적 맥락에 포지셔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성’만의 섹터나 분리주의엔 반대한다. 오히려 미술계란 뉴트럴한 지형 속에서 여성의 영역을 찾아내고 재포지셔닝하는 게 먼저라고 생각한다.”

그의 서울시립미술관장 임명 얼마 후 정형민 서울대 동양화과 교수(서울대 미술관장)가 국립현대미술관장에 임명됨으로써 이들에 앞서 지난해 2월 국립중앙박물관장에 임명된 김영나 관장과 함께 ‘빅3’ 국공립 미술관과 박물관 수장이 모두 ‘여성’으로 채워졌다. 이를 두고 미술계에 본격적인 우먼파워 시대가 열렸다고 떠들썩하지만 김 관장은 다소 냉소적이다. “그동안은 여성이 일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돌아가는 ‘자리’는 극소수였던 데 반해 이제는 여성들이 일할 시대적 여건이 마련됐을 뿐”이라는 것. 사실 사립 기관 차원에선 박명자 갤러리현대 회장이나 홍라희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 등 우먼파워가 두드러진다.

“세 여성을 묶는 것 자체가 아직도 이 사회가 가부장적 속성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 아닌가. 인간 개인의 역량보다는 우선 ‘여성’부터 보이는 것이다. 나 자신 이제는 ‘군번’이 됐다고 생각해 2006년 광주비엔날레 총감독직을 맡았을 때도 이미 경험한 바다. 섬세함 외에도 여성의 일 자체에 대한 욕심은 정말 남다르지 않은가. 세 명의 여성 관장들에 대해 경쟁적 관계를 부추기는 경향이 있어 유감이지만, 서로 도와주고 보완하는 가운데 각 미술관이 차별화 전략으로 가자는 데는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본다. 정형민 관장으로 말하자면, 이화여고 4년 후배라 동문 미술인 모임에서 경사 났다며 우리 둘을 위해 축하 모임을 해주겠다고 난리다(웃음).”

세 여성 관장은 모두 미술사 전공이지만, 김 관장은 다른 두 사람과 상당히 다르다. 아카데미보다는 현장을 종횡무진 뛰어다녔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한 그가 미술에 입문하게 된 것은 결혼 이후였다. 쌈지길을 기획한 문화 행정·기획가인 남편 천호선씨가 주뉴욕 총영사관 한국문화원 문정관으로 파견돼 시작한 미국 생활에서 받은 문화적 충격 때문이었다. 당시 박물관과 미술관을 섭렵하며 잭슨 플록, 앤디 워홀 등 거장에 매혹된 그는 맨해튼 헌터칼리지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미술사 공부를 시작했다.

“백남준 선생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보통의 미술사가에 그쳤을 것”

“유부녀로 늘그막에 공부하면서 솔직히 뭐가 되겠다는 생각 없이 ‘좋아한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뛰어들었고, 30여 년을 걷다보니 이 길에 서게 됐다. 조금씩 하다 보니 ‘비전’이 생겼다고나 할까. 이후 남편의 부임지를 따라 덴마크, 캐나다에 가며 공부를 계속했다. 지역마다 학제가 다 달라 석사학위를 받는 데 10년이 걸렸다(그는 캐나다 몬트리올 컨커디어 유니버시티에서 서양미술사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리고 귀국해 5년 만에 홍익대에서 박사과정을 끝냈다. 석사 때 고인 게 많아 그런지 의외로 박사학위는 쉽게 딴 셈이다(웃음).”

그의 인생 전환점은 고 백남준 선생이 마련해줬다. 그는 “백 선생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보통의 미술사가에 그쳤을 것”이라며 “백 선생님이 (작곡가) 존 케이지를 만나 인생이 바뀌었듯 나도 백 선생님을 만나 인생이 바뀌었다”는 말로 존경을 표했다. 그와 백남준의 첫 만남은 미국에 간 바로 다음 해인 1980년 레코드판을 깨고 바이올린을 부수는 등 전설적 퍼포먼스로 구성된 ‘키친’이란 아방가르드적 공연에서였다. 김 관장은 백남준의 퍼포먼스로 공연장 여기저기에 널린 깨진 판과 바이올린 조각들을 말끔히 치우기 시작했다. 이를 눈여겨본 백남준에게 그는 그 쪼가리들에 사인을 부탁했고, 백남준은 흔쾌히 스튜디오 방문을 허락했다. 이후  그는 “사인은 공짜”라며 그 쪼가리 하나하나에 직접 사인을 해줬고, 지금 그 쪼가리 사인들은 김 관장의 가보 1호가 됐다.

“페미니스트 지인들이 많았던 백 선생님 덕에 자연스럽게 삶에 대한 ‘다른’ 태도를 보게 됐고, 의식화 과정을 거쳐 미술 중에서도 비주류인 여성과 테크놀로지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그는 내게 현장 큐레이터 입문 계기도 마련해줬다. 10년간의 공백 끝에 92년 귀국한 후 95년 광주비엔날레 특별전으로 국내에서 첫선을 보인 미디어아트 기획전 ‘인포아트(InfoART)’를 그를 도와 진행했고, 이를 시작으로 국내외 많은 작업들을 주셨다(인포아트전이 물꼬가 돼 김 관장은 2000년 광주비엔날레 커미셔너, 2003년 베니스비엔날레 커미셔너, 그리고 2006년 광주비엔날레 총감독까지 맡게 됐다). 이런 과정들을 통해 그가 손수 내게 가르쳐 준 것은 ‘보통으로 해선 일을 해낼 수 없다’는 거였다. 작가인 동시에 뛰어난 기획자였던 선생님은 굉장한 치밀함을 감추고 있었다. 이런 것들을 그냥 자연히 봤기에 배운 그대로 하게 되더라.”

페미니즘과 비디오아트를 연결시킨 그의 박사논문은 이 분야에서 후배들이 탐독하는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그는 자신이 공부하고 전시 기획을 시작할 때만 해도 페미니즘이 경원시되고 테크놀로지 아트가 주변화되던 상황에서 이제는 이들 장르가 중심으로 발돋움하게 된 데 일조했다는 자부심을 느낀다. 특히 1994년 한국미술관 용인 이전 개관전 전시 기획을 맡아 관장을 설득해 열었던 ‘여성, 그 다름과 힘’전은 국내 페미니스트 첫 전시회로 주목받으며 윤석남, 김인순 등 모더니즘계 페미니스트 작가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1999년엔 기존 화단에 일대 충격을 몰고 온 여성미술제 ‘팥쥐들의 행진’ 기획전시를 총괄하면서 여성 작가 스스로의 현실 뒤집기와 기존 신화에 대한 도전을 시도했다. 페미니스트 비평가로 거의 유밀무이한 그는 후배들에게 페미니즘의 다양성 그리고 젠더로의 전이를 눈여겨보라고 당부한다.

“페미니즘은 성취 도구나 목적이 아닌 일종의 ‘태도’, 삶의 방식이다. 삶을 개척할 때 그런 태도로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자신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페미니즘을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요즘 페미니즘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복수의 ‘페미니즘스’(feminisms)로 존재하기에 각 분야의 모든 요소가 페미니즘스의 요소가 될 수 있다.”

비주류 분야에 일관되게 집중해왔던 그는 자신의 여정이 “양날의 칼” 같았다고 회고한다.

예술행정가인 남편과 상호 보완적 파트너십 “남편은 분열증, 난 편집증”

“진취적이고 아방가르드적인 변혁엔 항상 위험과 부담 그리고 대가가 따른다. 나 역시 일정 부분의 성취 뒤에 많은 상처와 상실감을 겪어야 했다. 현장의 생생함을 아카데믹한 대학 현장으로 가져와 현장에서 젊은 작가들과 토론하고 놀듯 대학에서 젊은 학생들과 함께 작업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보수적인 대학 분위기 때문에 이 열망을 접어야 했다. 나의 이 못 다한 ‘프로젝트’는 한 세대를 걸러 내 딸(천민정 작가, 미디어아티스트로 현재 성곡미술관에서 ‘POLIPOP’전을 열고 있다)에게서 실현되고 있다. 미국에서 미대 교수로 활동하고 있는 딸은 아시아계 여성 작가로서 내가 꿈꾸었던 현장과 아카데미 생활을 병행하고 있다.”

원래 아내가 화가가 되기를 소원했던 남편은 늘 상호 보완적인 작업으로 그를 뒷받침해줬다. 남편과의 관계에 대해 그는 우스갯소리로 “우리 남편은 분열증이고 나는 편집증”이라고 표현한다. 예술 행정가로 다방면에 관심을 가지는 남편과 작품에만 집중하는 그의 일면을 빗댄 말이다. 남편과의 파트너십으로 그는 사적인 예술관에 공공·공익적 마인드를 더할 수 있었고, 사회적 시행착오 상당 부분을 줄일 수 있었다고 한다. 

토막 낸 동물의 사체를 포르말린에 절여 유리관에 전시하는 등 그로테스크한 작업으로 각광받고 있는 영국 작가 데미언 허스트처럼 남보다 더 충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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