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는 어디에서나 우울증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우울증이라는 병명은 거의 들을 수 없었다. 설령 들었다 해도 감당하지 못할 큰 비밀이라도 들은 듯 당황스러워하고 난감해하거나, 아니면 우울증이 무슨 병이냐며 무시하거나 회피하기 일쑤였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병을 앓는 것이라 생각했고, 병의 무게도 개인에 따라 다양하게 매겨졌다. 그러나 요즘에는 내밀한 사석에서가 아니라, TV 토크쇼나 주부 대상 아침 프로그램, 심지어 오락 프로그램에서조차 알 만한, 아니 잘 알려져 있는 연예인, 스포츠 선수, 기업가는 물론이고 일반인들도 우울증 경험을 고백한다. TV 드라마와 영화에 우울증과 씨름하는 인물들이 일상적으로 등장하고,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어린이나 청소년, 가정주부들, 퇴직 가장들의 이야기가 빈번히 다큐멘터리 카메라에 잡힌다.

그런데 왜 우리 사회는 예전부터 있었던 우울증을 새로 발견된 신종 병인 것처럼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는 것일까? 우울증 환자들이 급증했기 때문일까? 지금에서야 우울증이 단순한 의욕 상실이나 신경과민이 아니라, 진지한 치료가 필요한 병이라고 알게 됐기 때문일까?

우울증이라는 병명에 익숙해질수록, 어디에서나 속내를 털어 우울증을 거리낌 없이 말하는 이들이 부각될수록, 우리 사회가 타자에 대한 걱정과 배려에 무감해지도록 훈련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자신에게 닥칠 수 있는 절망과 실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도록 미리 감정을 차단하는 훈련을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우울증이 대부분 마치 핏기 없고 육체가 없는 것처럼 다뤄지기 때문이다. 우울증의 병명에는 감정의 요소들이 배제돼 있고, 우울증을 앓는 이들은 시각적인 목록이 되어 단편적으로 다뤄진다. 우울증에 대한 사회적 환기가 우울증의 감정적인 경험이나 그런 경험에 대한 고백을 불편하게 느끼도록, 그리고 상실과 패배의 다양한 이야기 대신 망각과 극복이 단 하나의 비전으로 제시되도록 상투적으로 배열돼 있음도 발견한다. 

우울증에 대한 사회적 환기는 눈부신 성과와 집요한 도전 그리고 그것들의 객관적이고 형식적인 특징에만 몰두하고 집중하고 환호해 온 우리들의 문화를 돌아보게 한다. 우리 사회에서 소통되는 감각 경험이 흥분과 도취, 격정에 지나치게 치우쳐 있어서, 걱정과 근심, 실패와 좌절, 아픔과 슬픔에 반응하는 또 다른 감각 경험들이 사회적으로 소통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오랫동안 우리 사회는 마음의 중재 없이도 반응할 수 있는 강력한 감정만 허용했을 뿐, 미묘하고 느리며 끊어질 듯 이어지는 약하고 불안한 감정들은 아예 불허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급증한 우울증 환자 수에 놀라고, 전문가의 정확한 진단이 필요하다고 떠들기 전에, 다양한 감정을 배려하고 수용하는 사회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  

곧 세밑이다. 우리 사회가 마음의 도움을 받아 내 안의 좌절, 타인의 고통을 세세하게 느끼고 작은 부분까지 들여다보려는 노력을, 의식적인 치유를 시작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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