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청과 농협과 면사무소는 큰길가에 나란히 있었다. 어릴 때 살던 집은 면사무소와 농협 건물 뒤편에 있었다. 동네 뒷산에 성곽이 있었다고 마을 이름이 성내리였다. 우리 집은 아버지가 직장에 다니고 머슴과 소가 있던 농가였다. 마을에선 논을 볼 수 없었다. 텃밭이 있어서 밥상 차리며 풋고추 따고 마늘종 뽑고 상추를 뜯어다가 반찬으로 먹던 추억은 천국 같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마을에는 대대로 잘살았다는 집이 있었지만, 그 사는 모습이 위압감이나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6·25라는 전쟁이 한판 휩쓸고 지나가면서 마치 홍수처럼 지형을 바꾼 탓이기도 했다.

휴전이 된 이후 농사도 제대로 지을 수 있었고 정국이 안정된 뒤로 명절은 누구나 기다리는 행복한 날이었다. 추석과 설날이 그랬다. 집집마다 음식을 했다. 떡은 명절 하루 전에 했다. 이른 저녁이면 그 떡을 그릇에 담아 보자기를 덮고 돌렸다. 스무 집도 넘었다. 나와 동생이 심부름을 다녔다. 떡함지가 쑥쑥 줄어드는 걸 보면 내 입술이 댓 발이나 되게 튀어나왔고 마침내는 왜 우리 먹을 것 없어지게 다 남 주느냐고 징징거렸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에게 혼이 났다. 그것으로 나의 심술과 불안이 가라앉지는 않았다. 하지만 함지는 원래대로 찼다. 다른 집에서도 떡을 가져오기 때문이었다.

이런 풍속에서 자라났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욕심이 많아서 나누는 것에 인색했다. 욕심은 사람을 천하게 만드는 첫 번째 요소인데 그걸 몰랐다. 딸이라고 천하게 자라서 그랬을까? 천하게 취급받으면 결핍감에서 헤어나지 못할 테니까.

하여튼 욕심꾸러기로 환갑을 넘긴 노인이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나도 누군가를 위해 좋은 일을 해보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젊은 엄마들을 붙잡고 무료로 글짓기를 가르쳐주겠다, 아무리 말해도 찾아오지 않았다. 내가 소설가라는 걸 알면 더 그랬다. 그런데 집 근처의 생활협동조합에 말했더니 주부들이 모였다. 돈암동의 협동조합 사무실에서 글짓기를 가르쳤다. 왜 글짓기가 필요한지, 글쓰기가 자기를 돌아보고 치유하는 데 얼마나 좋은지 말했다. 글을 짓고 고치고 완성도를 높여가는 작업도 했다. 나로 말하면 평생 이 일만 해온 사람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도가 튼 편이다.

처음엔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났다. 주부들은 미안해했지만 나는 정말로 기뻤다. 도대체 이런 기쁨과 열정이 생기는 이유가 뭘까, 생각하다 깨달았다. 바로 ‘돈’이 끼어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돈으로 환산하지 않는 관계가 행복감의 이유였다. 

요즘 어린이들은 무엇인가를 할 때 꼭 보상을 바라고 일단 흥정을 하고 확인하는 버릇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아이들이 나쁜 것이 아니라 이 시대가 그런 시대이기 때문에 그렇게 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인간관계가 얼마나 삭막한 것인지, 사람을 외롭게 만드는지 안다면, 우울해질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중국의 소수민족 모소족에겐 노이로제나 우울증이 없다고 한다. 그들의 삶의 방식은 소유욕을 기반으로 구성된 사회가 아니다. 그들은 부지런하고 잘 웃는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꼽는다. 아무런 계산 없이 타인을 반기는 그들에게서 받은 위로의 에너지가 아직도 나를 살아가게 하는 희망이다. 부족해서 오는 결핍감도 있지만 지나치게 많아서 생기는 결핍감도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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