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기적이란 없다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
마지막 산행을 준비하며 마지막 배낭을 싸고 마지막 샤워를 했다. 샤워를 마친 후에는 마지막 의식처럼 손톱과 발톱을 짧게 깎고 깨끗하게 빨아둔 옷으로 갈아입었다. 잠시 눈을 붙이려 누웠지만 예상대로 잠은 잘 오지 않았다. 그래도 불안하거나 초조하진 않았다. 잠기운이라곤 없는 초저녁에 오로지 체력을 충전하기 위해 억지로 잠을 청하는 일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마지막 버스, 마지막 새벽 산행, 백두대간의 마지막 구간을 걷는 순간… 이 모두가 기적 같다.
기적을 상식으로는 믿기 어려운 기이한 일, 절대적인 힘이나 신(神)에 의해 행해지는 불가사의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면, 아마도 나는 지금까지 그래왔듯 기적이란 없다고 생각하며 살 것이다. 실증주의와 실용주의를 신봉하는 리얼리스트가 바다가 갈라지고, 불치병이 단번에 낫고, 하늘에서 벼락이 모두가 미워하는 누군가의 정수리로 떨어지는 걸 믿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처럼 거창한 미스터리와 도저한 신비의 거품을 제거한다면, 기적이란 실로 어디에나 있다. 나는 운이 기막히게 좋으면 평생 한 번 볼까 말까 한 대단한 기적보다는 가까운 곁에서 도글도글하는 낟알 같이 자잘하고 야무진 기적을 믿고 싶다. 그리고 그렇게 기적의 숫자가 무수히 늘어난다고 해도, 그것이 정말 기적이라면, 그 놀라움과 감동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 산행을 축하하는 의미라고 하기엔 여전히 반갑잖은 비님이 오신다. 우중 산행은 언제나 찜찜하고 번거롭다. 아무리 두꺼운 우비를 덮어쓰고 신발을 비닐봉지로 친친 감아도 비가 아니면 땀으로 몸과 발이 젖어든다. 이제 제법 차가워진 날씨에 젖은 장갑을 낀 손가락이 시리고 아리다. 미시령에서 대간령까지가 출입 통제 구간이라 창암 계곡을 통해 대간길에 올라서자니 몇 번이고 계곡물을 건너야 했다. 그러다 어둠 속에서 발을 헛디뎌 한쪽 등산화에 물이 들어갔다. 총체적으로 불편하고 불쾌한 상황이다. 하지만 예전같이 투덜대며 누구도 아닌 대상을 향해 욕을 날리는 일은 없다. 그간 백두대간 종주라는 결코 쉽지 않은 여정에서 고난을 통해 고통을 인정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불편해도 힘겨워도 기어이 참는다. 다만 그 자리에 머무른 채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한 걸음을 쉼 없이 내딛다 보면 언젠가 그 고통의 자리에서 빠져나갈 수 있음을 믿는다.
“언제나 변함없이 그 곳에 있어 줘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아마도 때때로 그리울 거예요!”
축축한 몸과 촉촉한 맘으로 마지막 산행을 마치고 진부령에서 종산제를 올렸다. 앞서 백두대간 종주를 마친 선배들이 사준 황태구이를 맛있게 먹고 서둘러 종산식이 열리는 학교로 오니, 꼭 작년 이맘때 우리가 5기 선배들에게 했듯이 7기 팀원들이 스틱을 세우고 불꽃을 피워 올리며 환영을 한다. 조금 쑥스럽긴 하지만 기꺼이 부러움 섞인 축하의 말에 “감사합니다!”라고 씩씩하게 답한다.
종주 증서와 기념패를 받고 동영상으로 뜬 우리의 족적을 감상한다. 사진 속에서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으로 활짝 웃는 우리는 팔자 좋은 유람객들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길을 겪었던 우리는 안다. 그 걸음걸음에 쏟은 땀과 눈물과 (많지는 않지만) 피를…. 아직은 아무것도 실감나지 않는다. 내가 그 무수한 길을 걸었다는 사실이 기적인 양 꿈결 같다. 그리하여 과연 무엇이 변했을까? 산, 그리고 삶의 고통은 한 번 겪었다고 하여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경험이 진정한 깨달음이 될 때 삶의 호흡을 조절해 고통을 줄이는 능력이 조금씩 자라날 뿐이다. 숨결은 낮아지고 눈길은 멀어진다. 그때야 한 걸음 한 걸음이 당당하고 굳세어진다.
마침내 백두대간 종주가 끝났다. 하지만 끝이면서도 끝이 아닌 듯한 이 기분은 바로 앞으로 가야 할 머나먼 길들 때문이리라. 또 다시, 출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