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후견인 통제하 여성 선거권은 실효성 낮아
‘총선 의회 요구 무마하기 위한 변명거리’ 지적도
국왕의 여성 참정권 허용 발표는 사우디 여성의 인권 향상에 있어 혁신적인 진보로 여겨지는 동시에 사우디 여성들의 열악한 상황을 전 세계에 알린 계기가 됐다. 사우디는 중동 국가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율법을 적용하는 국가로 ‘샤리아법’에 따라 여성의 사회적 권리를 극히 제한해 왔다. 지구상에서 여성의 운전을 금지하는 유일한 나라일 뿐만 아니라 여성은 남편이나 아버지 등 남성 후견인의 허락 없이 외출이나 여행을 할 수 없으며 여성에게 투표나 정치참여도 허용되지 않는다.
국제여론이나 여성계에서는 사우디 국왕의 참정권 허용 결정을 환영하면서도 ‘이번 발표가 진정으로 사우디 여성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사우디 국왕의 발표 직후 뉴욕타임스는 “아버지나 남편, 형제들이 여성들의 법적행동 참여를 막고 있는 상황에서 새 법률이 적용된다고 해 얼마나 많은 여성이 선거에 참여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1960년 도입된 여성에 대한 공공교육이 실제로 받아들여지기까지 수년의 세월이 걸렸다”는 선례를 들었다.
그동안 사우디 여성들은 운전권과 이동권, 정치적 대표성을 획득하기 위해 다양한 운동을 전개해왔다. 지난 5월에는 선거법 개정운동을 전개 중인 ‘사우디 여성혁명’이라는 여성운동 조직이 CNN을 통해 보도돼 눈길을 모으기도 했다. 선거사무소를 직접 찾아가 유권자 등록을 시도하며 여성의 참정권을 주장했던 이들은 조직의 가장 큰 목표로 후견인 제도의 철폐를 내세웠다.
영페미니스트를 위한 블로그 커뮤니티 ‘fbomb’는 “왕이 통치하는 국가에서 여성들의 투표권과 정치참여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며 “사우디 여성들에게 있어 더 중요한 이슈들이 있지 않은가”라고 주장했다. 사우디에서 정치참여란 지방의회 선거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며 지방의회의 절반 이상이 지명을 통해 선출되는 상황에서 선거가 갖는 힘이 극히 미약하기 때문이다.
사우디 국왕의 발표에 숨겨진 정치적인 의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의회 역할을 하는 국왕의 국정자문기구 ‘슈라 위원회’의 의원 150명 전원을 선거를 통해 선출해야 한다는 사우디인들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상황에서 국왕의 선택은 이를 무마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이라는 것이다. 갑자기 여성의 참정권 허용 이슈를 내세워 전국적인 총선 의회의 도입을 늦추려는 변명거리로 삼기 위함이다.
사우디에서 허울뿐인 여성의 참정권 이슈는 여성의 운전 허용보다도 덜 논쟁적인 이슈로 알려져 있다. 종교계 고위 인사들과 왕자들이 여성의 운전 허용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 뉴스 블로그 ‘페미니스팅’은 “석유 수출을 통해 국가 경제의 가장 큰 부분을 지탱하고 있는 나라인 사우디에서 자국 여성들의 운전을 금지하고 있는 것은 비통한 아이러니”라고 비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