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방송인 ‘유희열의 스케치북’ 공개방송이 있던 지난 4일 화요일 저녁, 녹화 현장을 찾았다. 회사를 ‘칼퇴’(정시 퇴근)하고 부랴부랴 달려온 직장인 관객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회사원 김수민(30·남·서울시 용산구)씨는 “회사에서 제일 막내인데 간 크게도 상사와 선배들을 다 제치고 제일 먼저 퇴근했다”며 “워낙 입장 경쟁이 치열한 프로그램이라 언제 또 당첨될지 알 수 없는데, 이런 황금 같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않으냐”며 웃었다.
이날은 지정 좌석권 외에도 선착순 좌석권 시스템이 도입된 날이기도 했다. 선착순 좌석은 오전 10시부터 번호표를 배부하는데 이날 첫 번째 입장 관객은 박성도·최혜미 대학생 커플이다. 이들은 오전 7시부터 공개홀 앞을 지켜 당당히 숫자 ‘1’이 쓰인 번호표를 쟁취했다. 박성도(25·경기도 성남시)씨는 “만난 지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이벤트로 방청을 신청했고, 여자친구에게 좋은 추억을 만들어주기 위해 새벽같이 집을 나섰다”며 “혹시나 프러포즈 이벤트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하고 있다(웃음)”는 희망을 여자친구가 듣지 못하도록 기자에게 살짝 속삭였다.
수십 대 일의 경쟁률을 뚫어야 방청할 수 있는 인기 프로그램인 덕에 신청자들 사이에서도 일종의 규칙이 저절로 생겼다. 인터넷 게시판에는 ‘당첨된 표는 절대 판매하지 말자’ ‘간절히 당첨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녹화 현장을 정말 찾을 수 있을 때 신중히 신청하자’ ‘녹화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자’ 등의 방청객 수칙들이 눈에 띈다.
입장을 기다리는 방청객들에게 최대의 관심사는 ‘어떤 가수가 출연할까’라는 점이었다. ‘스케치북’은 녹화에 들어가기 전까지 철저히 출연자 비공개의 원칙을 지키기로 유명하다. ‘이번 주에는 아이돌이 출연할 때가 됐다’ ‘대유행하고 있는 오디션 프로그램의 인기 참가자가 나온다더라’ 등 역대 출연진을 분석하고 제법 논리적인 예측을 내놓는 관객들도 많이 보였다.
‘스케치북’은 MBC TV ‘라라라’, SBS TV ‘김정은의 초콜릿’ 등이 폐지된 가운데 정통 음악 프로그램의 맥을 이어오고 있는 보기 드문 프로그램이다. 요즘 인기 절정을 달리는 아이돌부터 가요시장에서 소외된 인디밴드, 록밴드, 실력파 신인, 연기자 등의 폭넓은 출연진이 실제 콘서트를 방불케 할 정도의 수준 높은 라이브 공연을 선사한다.
직장인 이선희(33·서울시 마포구)씨는 “얼마 전에도 당첨된 적이 있는데 가수들이 방송 녹화분의 공연이 끝나도 ‘이제 본격적으로 놀아보자’며 무대를 떠나지 않더라. 특히 리쌍은 6곡의 노래를 불렀는데, 이 중에서는 심의 때문에 방송이 금지된 ‘TV를 껐네’라는 곡도 있었다. 몇만 원씩 하는 콘서트에 비해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 공연이었다”고 회상했다.
본격적인 녹화에 들어가면 쇼를 함께 만들어가는 방청객의 힘은 더욱더 진가를 발휘한다.
이세희 PD는 “카메라로 객석을 비추고, 방청객의 환호를 담아내는 것은 쇼의 분위기를 살리고 감동을 극대화하는 데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가 되어준다”며 “방송을 만드는 것은 아주 힘든 작업이지만, 신기하게도 이 프로그램은 만드는 과정부터 끝까지 PD인 나 자신이 매우 즐겁다. 그 이유가 관객의 피드백이고, 그것이 또한 프로그램이 장수할 수 있는 비결이 아닐까 싶다”고 밝혔다.
실제로 관객들은 재밌고 감동적인 사연으로 프로그램의 소재를 제공하기도 하고, 적극적인 의사표현으로 출연진의 결정 등 기획 과정에 참여하기도 한다. 가수 성시경이 진행하는 코너인 ‘the 만지다’는 관객의 참여가 가장 극대화되는 부분이다. 이날은 한 방청객이 연인에게 했던 고백을 소재로 한 사연을 공개해 많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또 게시판에는 “‘탑밴드’ 출신의 브로큰 발렌타인을 스케치북에서 꼭 보고 싶다”는 등 자신이 지지하고 응원하는 가수들의 출연을 요청하는 글도 많았다.
관객에게 감동을 주는 것을 넘어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고 있는 ‘유희열의 스케치북’. 음악 프로그램의 정통을 표방하는 이 프로그램이 음악 마니아를 넘어 많은 대중에게 공감을 얻고 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