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면 나는/ 이 세상이 빗물로 연결되어/ 다 한통속이 되는 느낌이야
이것은 시 한 편의 첫 문장이다. 이 시를 쓴 사람은 노년으로 접어든 시각장애인,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맹인이다. 그는 점자로 된 자신의 작품을 들고 이렇게 시작되는 시 ‘비가 오면’을 낭독했다. 비가 오면 빗물로 세상이 어항이 되어, 모두 똑같이 물고기가 될 테니, 차별이 없어질 것이란 희망을 담았다. 그리고 시는 이렇게 끝난다.
그 옛날, 엄마의 자궁 속에서 눈을 감고/ 신과도 같은 엄마의 목소리를 듣던 때처럼
나는, 내가 남의 눈에 보이지 않는 여러 가지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장애를 많이 가지고 태어나서 그런 성정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기가 힘겨우니 아마도 ‘소설가’라는 직업을 선택했을지 모른다. 내 유전자가 가진 재능 중에서 하필 소설 쓰는 재능이 개발된 것도 아마 그런 이유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위의 시를 쓴 분은 보이는 장애를 가진 분이다. 장애라는 말의 의미는 비장애, 그러니까 정상이란 의미를 두고 그 기준에서 생겨난 말이다. 나는 보이지 않는 장애를 가졌기 때문에 정상인으로 보이고 정상이라 믿고 행동한다.
정상인인 내가 비정상인의 독서 관련 행사에 참여했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장애인 독서문학의 날을 정해 그들이 지은 산문과 시를 낭독하고 독후감 쓰기 대회를 했다.
올해 초, 특별한 경험을 했다. 듣고 말하기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박경리 문학기행을 떠났다. 박경리 문학관에서 그들은 수화 통역을 통해 박경리 선생님의 생애와 문학작품 그리고 정신을 들었다. 그것을 듣고 이해하려는 그들의 자세는 오랜 가뭄 끝에 내린 단비를 빨아들이는 수목같이 열정적이고 경건했다.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나는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그들과 내 소설작품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질문은 강렬하고 진지하고 순수했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한다는 것이 정신이나 영혼의 장애가 아니라는 것, 그런 보이는 장애 때문에 보이지 않는 부분이 더 깊고 강하다는 걸 불현듯 깨달았고, 한편 나의 가당찮은 오만이 느껴져 속 깊이 부끄러웠다.
한 나라 그리고 한 사회의 품격이나 그 수준은 보이는 장애인의 삶이 어떻게 대접받는가를 보면 알 것 같다. 그들을 정상인의 기준으로 보아 무관심해지고 더 나아가 소외시키고, 심지어 얕잡는다면 그 사회는 틀림없이 천박하거나 병든 사회일지 모른다.
예순 나이를 넘어 보이던 시각장애인인 강일선님. 그가 비를 기다리는 건 세상이 어항이 되기 때문이다. 어항 속에선 모두 연결되니까. 어느 하나도 외따로 떨어지지 않고 누구도 고립되지 않으니까. 그가 기다리고 꿈꾸는 세상은 비가 와서 어항이 되는 세상, 차별 없는 세상이다. 차별이 없는 사회는 ‘엄마의 자궁 속에서 눈을 감고 신과도 같은 엄마의 목소리를 듣는 것’과 같다고…. 평생을 시각장애인으로 살아온 한 사람의 슬프고 순수한 소망에 마음을 열 수 있는, 따뜻한 사회를 만드는 게 어렵지 않은 나라에서 살아봤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