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자살이 심각하다. 매일 1명꼴이란다. 대부분 성적과 학교생활의 비관이 원인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너무 조용하다. 내 자식이 자살했다면 이렇게 조용할 수 있을까? 우리 사회의 자녀가 한 명씩 죽어간다. 매일 TV의 머리 뉴스여야 하고, 신문 1면 머리기사여야 하는데, 왜 이렇게 조용할까? 교육문제에 관해 하루도 조용해서는 안 될 일인데, 왜 이렇게 조용할까? 결국 ‘경쟁’이 원인인데, 경쟁을 철칙으로 받아들이는 이런 무지막지한 엉터리 사회에서 모두 남의 일로 받아들인다.

짧은 글에 구체적인 정책은 말할 수 없지만, 교육과 만남을 생각해 보면서, 바로 청소년 자살을 우리 자녀의 문제로 받아들여 심각하게 고민하고 떠들고 매일매일 사회적 이슈로 만들어 교육을 바로잡자.

‘1990년대 중반쯤에’라는 영화가 있었다. 소리꾼들의 삶을 통해 우리 시대의 변화를 그린 작은 역사의 이야기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소리의 특색에 따라 서편제와 동편제로 나누어지는 모양인데, 서편제는 애절함을, 동편제는 무거움을 좀 더 담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어렴풋이나마 새겨져 있었던 소리의 경지에 관한 대사가 떠오른다. ‘한(恨)에 사무쳐서 한풀이를 하고, 그리고 그 한을 넘어서면 서편제도 없고 동편제도 없다. 한에 묻혔다가 묻히지 말고 한을 실었다가 한을 넘어서면, 득음(得音)의 경지만 있다.’ 어려운 듯하면서도 참으로 삶의 지혜가 있는 듯하기도 하다.

우리는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사람들을 만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의도와 목적에 갇힌 만남은 이해관계에 따른 약효가 떨어지면 지속될 수 없다. 지속되더라도 형식적 만남에 그친다. 중요한 것은, 비록 우리가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만났다 하더라도, 의도와 목적을 넘어설 때 인간적인 만남, 만남의 순수성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적 상품 사회에서, 더구나 온통 돈이 지배하는 사회 풍토에서, 오로지 경쟁만 있는 사회에서, ‘인간’의 진정한 만남은 드물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아마도 대부분 의도와 목적과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만남으로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에 사무쳐 출발했지만 한을 넘어서면 득음의 경지만 있는 것처럼, 의도와 목적과 이해관계로 만났지만 그것을 넘어서면 인간적으로 이루어지는 순수한 만남의 지점이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인간사 온갖 희로애락이 분출되기에, 서로 부대끼면서 서로 배려하고 서로 다투면서 서로 나누는 보통사람들의 삶의 정(情)으로 가득 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에 필요한 모든 정신적, 물질적, 문화적, 사회경제적 가치도 본래의 빛과 향기를 뿜어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너무 다르다. 생김새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여러 환경도 다르고, 통상의 사회적 지위도 다르다. 그런데 다름은 만남이요, 만남은 인정함이다. 인정함은 배려요, 배려는 나눔이다. 그리고 나눔은 함께함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의 다름은 우리 모두 함께함이다.

경쟁 상대인 어느 집 누구의 아들딸들의 자살이 아니다. 바로 내 새끼가 매일 자살하고 있다. 내 새끼를 경쟁 속에서 자살시킬 수 없다. 우리의 삶도, 만남도 그래서 교육도 다름의 함께함이다. 매일 우리 아들딸들의 자살을 문제 삼아 교육을 바로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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