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문화계는 온통 위안이 대세다. 위안이 되는 말, 위안을 해줄 수 있는 멘토, 위안이 되는 글 한 줄을 필요로 한다. 막막한 미래를 호소하는 20대 청년들이, 인생을 헛살고 있다고 자탄하는 30대 여성들이 그리고 전환기적 순간에 다다르니 막막하고 외롭다고 말하는 40대 남성들이 말이다. 그들은 위로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위로는 세대별 맞춤형으로 제공되고 있다. ‘이러이러한 20대여’ ‘혹시 30대라면’ ‘아마도 40대는’과 같은 꽤나 긴 수식어를 달고 말이다.

밀란 쿤데라는 그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동정에 대해 고민한다. 라틴어에서 파생된 동정(compassion)이라는 단어는 ‘함께’를 뜻하는 접두사 ‘콤(com)’과 고통을 의미하는 어간 ‘파시오(passio)’의 합성어다. 다른 언어 예컨대 체코어, 폴란드어, 독일어, 스웨덴어에서도 이 단어는 똑같은 뜻의 접두사와 ‘감정(sentiment)’이라는 단어로 구성된 명사이다.

밀란 쿤데라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 동정은 고통을 함께하는 행위를 말한다. 밀란 쿤데라가 사랑의 궁극을 동정의 가능성에서 찾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행위의 진정성은 고통을 함께하는 것에서 증명될 수 있다. 행복을 함께 나누는 것은 쉽다. 하지만 고통만큼은 매우 사적이고 주관적 영역으로 축소되곤 한다.

쓰라린 상처와 환부 때문에 아파할 때 상대는 다만 그 고통을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너의 고통을 내가 느끼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따라서 동정하고 공감하는 것도 쉽지 않다. 더더군다나 사랑하고 동정하고 공감한 이후에나 할 수 있는 위안은 거의 불가능하다. 만일 이런 위안이 아니라면 그것은 위안의 포즈를 한 거짓 환상에 불과할 것이다. 동정하는 것이야말로 능력이다.

그런데 요즘 대중은 굳이 포즈인지, 사실인지 거짓인지 그 여부에 관심이 없는 듯싶다. 위안이나 위로, 멘토라는 말에 무작정 달려든다. 이는 어떤 점에서 보자면, 위안을 받고 싶어 하는 대중의 고통 역시 포즈일 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래서 ‘아프니까 청춘이다’와 같은 뻔한 말에 매료당하는 것은 아닐까? 나의 고통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젊다면 누구나 겪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라는 대답에 안심한다. 나의 특별한 고통을 남에게 이해받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나의 현재 상황을 보편적 고통으로 일반화하고 싶은 것이다. 중요한 건 위안의 다독거림이지 위안의 내용이거나 진실성은 아니다.

그런데 왠지 이런 세태들은 씁쓸한 뒷말을 남긴다. 위로가 키워드이기 이전 우리는 수백 권·종의 자기 계발서에 시달렸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하고, 인생의 계획표를 철저히 세워야 하며, 재테크는 빠를수록 좋았다. 아니 좋다고들 말하고, 채찍질하고, 채근했다. 그런데 이렇게 채찍질에 지친 대중을 위해 이제는 위안과 달콤한 위로를 준다.

세상의 흐름은 물론, 누군가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트랜스포머’ 같은 대규모 할리우드 상업영화에서조차 아이비리그 출신의 취업난이 등장하는 걸 보면 꼭 우리나라만의 현실도 아닌 듯싶다. 하지만 동정이라는 게 이처럼 값싼 위로와 동의어가 돼도 되는 걸까? 회의가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다. 차라리 동정 없는 세상을 외치던 90년대의 비정함이 위악적이지만 진실해 보이는 것도 아마 같은 맥락에서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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