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 때 책을 볼 때마다 이상한 습관이 하나 있었다. 책의 첫 페이지가 아니라 마지막 페이지를 펼쳐보고는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를 확인하고서야 책을 읽기 시작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소심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지만 해피엔딩이 부적처럼 버티고 있었기에 당시 나는 결말에 이르기까지 내용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슬퍼도 견딜 수 있었다. 주인공이 겪는 온갖 시련이나 고통은 해피엔딩을 더 빛나고 값지게 하기 위해 동원되는 장치에 불과했던 것이다.

나의 이 해피엔딩에 대한 집착은 이후의 영화 보는 습관에도 이어졌다. 고전 ‘러브스토리’를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고 하면 모두들 눈이 휘둥그레지는데 내가 일찌감치 이 영화를 챙겨볼 영화 목록에서 지웠던 이유는 여주인공이 백혈병으로 죽는 바람에 마지막이 해피엔딩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눈물을 흘리기가 두려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최근 한국 극장용 애니메이션 영화의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마당을 나온 암탉’은 내게 ‘해피엔딩의 의미’를 더 심각하게 반추하게 만든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양계장 안에 갇혀 알만 낳던 암탉 ‘잎싹’이 양계장을 탈출하면서 겪는 자유의지와 자연의 섭리를 이해하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이 애니메이션 영화는 각각의 세대를 대표하는 잎싹과 초록의 캐릭터 배치를 통해, 초록이 엄마와 같은 닭이 아닌 청둥오리로서 정체성을 찾아가는 가운데 어느덧 장성해 넓은 세상을 보러 간 뒤, 잎싹을 둘러싼 풍경을 성찰적으로 표현함으로서 생각의 지평을 넓혔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20여 년 전이었다면 나는 평생 알만 낳는 것을 숙명으로 알고 있는 양계장의 닭들을 잎싹이 마당으로 함께 나가도록 적극적으로 이끌거나 최소한 철학적 사색으로 단단하게 자기 세계를 구축하기를 적극적으로 주장했을 것이다. 모성을 본능적인 감정으로 부각시키며 늙고 병들어 초라하기 그지없는 다소 나약한 패배주의적 모습으로 자신의 몸을 기꺼이 내주는 잎싹의 모습에 당연히 분노하며 의문을 표했을 것이다. 특히 암탉이기에 어디에서도 인정받지 못해 절망하면서도 자신을 엄마라 부르는 초록을 향해 보여주는 희생적 모성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장면에서 내가 생각이 많아지는 것은 그저 나이 탓일까. 

그러나 때로는 버거운 우리의 실제 삶이 그저 해피엔딩을 추구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어느 순간 알아버릴 만큼 우리를 둘러싼 삶이 여전히 녹록지 않으며 바라든 바라지 않든 해피엔딩이 그저 달콤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만큼은 세월이 많이 흘렀다. 그리고 어쩌면 누가 뭐라 하든 잎싹의 그 선택은 다소 파격적이며, 꼭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한 아이의 어머니로서 그 선택이 주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이제 잘 알게 되었다.

따라서 세계를 향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공명을 불러일으키는 그 울림은 단순하지 않으며 그 선택이 주는 도전은 여전히 생각할 여지를 많이 남긴다. 그리고 이전의 나를 매혹시켰던 그 수많은 해피엔딩 역시 생각할 여지가 많은, 어쩌면 행복하지 않은 해피엔딩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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