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작가 그리고 여성…그것을 잊지 않는 것이야말로 행복한 의무”

아주 오래 전 일은 아니다. 근대사회가 서구열강을 중심으로 세계 지배 구도와 세계시장 진출에 박차를 가하던 19세기까지도 이른바 ‘여류 작가’들은 자신을 숨기고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철학자 쇼펜하우어씨께서 여자는 어린아이와 남자의 중간쯤에 있다 하시고, 존슨 박사님께서 여자가 글을 쓰는 일은 ‘뒷다리로 걷는 강아지’처럼 ‘모양은 좋지 않아도 사람을 놀라게 한다’고 칭찬하시는 지경에 어지간한 용기나 배짱이 아니고서야 감히 ‘여류 작가’로 커밍아웃 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 한 칸’에 그토록 목을 매었고, 뉴캐슬 후작 부인은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다가 낙천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반미치광이가 되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여성이 투표권을 갖는 것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위험하고 도발적인 일로 취급되었다. 왜냐하면 글을 쓴다는 것이야말로 한없이 무애한 영혼의 자유, 어느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자기만의 삶을 주장하는 일이기에. 

우리 역사에도 유사한 수난사가 있다. 중세 조선에서 글을 써 작품을 남긴 여성은 한글 창제 이후 일기와 서간 등을 남긴 궁중의 여인들을 제외하면 딱 두 부류다. 하나는 신사임당과 허난설헌 같은 사대부가의 여인이고 다른 하나는 황진이, 이옥봉, 이매창 등과 같은 기생이다. 두 부류의 사회적 지위는 극과 극이었지만 문자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신분은 그들뿐이었다.

하지만 신사임당은 아들 율곡이 아니었다면 세상에 존재를 드러낼 수 없었고 허난설헌 역시 동생인 허균이 상찬하고 중국에서 인정받지 않았다면 그대로 홍진에 묻혔을 것이다. 기생들의 시 역시 주 고객층인 양반들과 노니는 과정에서 우아한 기예의 하나로 여겨졌을 뿐 독립적인 작품 활동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19세기에 이르러 조선에도 김금원, 박죽서, 김운초, 김경춘, 김경산 등의 당찬 여성들이 등장해 여성들의 문예활동 모임인 삼호정(三湖亭)시단을 결성했다. 시단의 리더 격인 김금원은 열네 살에 남장을 하고 홀로 금강산을 구경할 정도로 호방했고 작품에서 삶을 관조하는 여장부풍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동인들은 서녀 출신에 양반의 첩이라는 특수한 지위에 있었다.

여성이 글을 쓰는 일이 위험하다고 여겨지는 이유 중 하나는 글 쓰는 여성들의 평탄치 못한 삶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 최초의 근대 여성 소설가로 꼽히는 김명순의 경우가 대표적인데, 그녀는 추문에 휩싸여 제대로 재능을 꽃피워보지도 못한 채 일본의 정신병원에서 홀로 죽었다. 하지만 김명순을 죽음까지 몰아넣은 것은 ‘여류 작가’의 특별한 ‘팔자’가 아니라 김기진과 김동인 등 좌우를 가리지 않고 몰려들어 물어뜯은 동료 남성 작가들이었다. 

지금은 어느 때보다 여성 작가들이 왕성히 활동하는 시대다. 하지만 2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뒷다리로 걷는 강아지’로 취급받던 선배들을 생각하면 키에르케고르의 저주가 역설적으로 되새김질된다. “여자가 되었다는 것은 이 무슨 불행인가? 게다가, 여자이면서 자기가 그중의 하나라는 것을 정말 모르고 있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지독한 불행이다.”

나는 작가다. 그리고 여성이다. 그것을 잊지 않는 것이야말로 행복한 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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