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텔레비전을 자주 보는 편은 아니지만 화요일 저녁을 차릴 무렵이면 전원을 켜게 만드는 프로그램이 있다. 미국의 리얼리티 쇼 ‘내니 911(nanny 보모)’ 한국판이라 할 수 있는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가 바로 그것이다.

시작 화면은 대개 긴박한 음악과 함께 찢어지는 울음소리와 비명, 요란한 소음으로 출발한다. 곧이어 떼쟁이, 욕쟁이, 심술쟁이, 악동, 울보, 응석꾸러기, 눈치꾸러기… 온갖 별종 아이들이 등장해 가지가지 떼를 쓰며 말썽을 피운다. 하지만 시청자가 짜증을 내며 채널을 돌리지 않는 까닭은 이 지옥 같은 상태가 곧 완전히 다르게 변하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격렬하게 울며 발버둥질하는 아이를 다리 사이에 끼우고 진정될 때까지 힘으로 ‘제압’하는 전문가의 훈육 방식과, 집안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를 통해 아이의 ‘이유 없는 반항’ 뒤에 숨겨진 반드시 ‘이유 있는 상처’를 밝혀내는 모습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한 것이다.

아무리 어르고 달래고 당근과 채찍의 방법을 총동원해도 막무가내인 말썽꾼들 앞에서 쩔쩔 매는 젊은 부모들을 보면 안타깝고도 안쓰럽다. 나 역시 아이를 키우며 그 시절을 지나온 엄마로서 일차적으로 공감과 연민이 생긴다. 텔레비전에 제보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는 없었지만 아이를 키우는 일은 정말 힘들었다.

지금까지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여자들이 당연히 해낸 ‘생물학적 역사적 사회적 숙명’에 왜 너만 호들갑에 엄살이냐고 야단친대도 소용없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것이 인생에서 처음 겪는 일이었고,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로 인해 내가 얼마나 모성애가 강하고 희생적이며 헌신적인가를 확인했다기보다, 아이를 통해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나약하고 무능력한 존재인가를 깨달았다. 아이는 시시때때로 나를 시험에 들게 했고, 나는 지면서 배웠다. 그것은 애초에 이길 수 없는 싸움, 기꺼이 지기 위해 하는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아이가 그토록 떼를 쓰고 말썽을 피우고 온 집안의 골칫덩이가 된 이유는 언제나 하나다. 엄마가 문제다. 그 아이를 낳아 기르는 1차 양육자인 엄마의 책임이 가장 크다. 아이들은 죄가 없다. 엄마가 제대로 사랑하고 돌보고 가르치지 못했기에 아이는 상처를 견디지 못해 그토록 부대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문제를 유발시킨 ‘나쁜 엄마’만을 비난하기에는 상황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 나쁜 엄마는 제대로 양육 방법을 모르는 무지로부터 비롯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그녀 자신의 삶에 문제가 있기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나쁜 엄마 뒤에는 대개 나쁜 아빠, 무심하고 이기적이며 방관자처럼 아이의 교육을 몽땅 엄마 책임으로 돌리는 아빠가 있다. 그런데 이 나쁜 아빠보다 더 나쁜 것은, 이처럼 고립된 채 불행한 엄마에게 현실적인 모성 보호는 해주지 않으면서 환상 속의 모성애만을 강요하는 세상이다. 이것은 결코 무지하고 나약하고 나쁜 엄마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그 엄마의 아이가 결국 세상의 아이, 곧 ‘우리 아이’이기 때문이다.

사실 프로그램 제목으로는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보다 ‘우리 엄마가 달라졌어요’가 더 잘 어울린다.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가 행복하다. 엄마들이 좀 더 행복해지는 방향으로 엄마들의 삶이 달라져야만 아프고 슬픈 우리의 아이들은 달라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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