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도였던 선생은 결혼과 함께 살림에 몰두, 5남매를 기른 후 40세에 등단하셨다. 요즘 말로 ‘경력단절’을 극복한 ‘재취업’ 여성이었다. 그 후 40년 동안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엄청난 양의 작품을 그것도 빼어난 수작들을 생산해내셨다. ‘토지’의 박경리, ‘혼불’의 최명희 같은 스케일이 큰 대하소설가와는 달리 박완서 선생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자리를 샅샅이 훑고 다녔다. 정치적·경제적 격동기의 한국 사회는 생활의 작가에게 대하소설 만큼이나 소재가 풍부한 작품의 무대가 됐으리라. 박완서 선생은 작품 제목대로 우리에게 ‘부끄러움’을 가르쳤다. 누가 더 잘살고, 누가 더 좋은 학교 가고, 누가 더 출세하는가에 혈안이 됐던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정신적 긴장감을 조근조근 이야기로 풀어내 주었다.
그의 대표작 중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는 여성신문 창간 이듬해인 1989년에 연재됐던 소설이다. 주인공 차문경이 싱글맘으로 세상을 헤쳐 나가는 과정을 통해 저자는 가부장제 결혼제도의 유치하고 비열하고 잔혹한 실상을 낱낱이 고발한다. 베스트셀러가 된 이 소설은 2003년 TV 드라마로 방영돼 다시 한 번 큰 인기를 얻은 바 있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란 소설 제목은 당시 앞선 여성들이 쉽게 꿈꾸는 ‘평등한’ 결혼이란 것이 얼마나 이루기 힘든 꿈과 같은 것인지, 또 관습과 인습이란 좀처럼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2011년 다시 소설의 제목과 마주해 본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이젠 다른 답을 찾을 수 있겠다. ‘우리의 꿈은 이뤄지고 있다’ ‘우린 더 큰 꿈을 꿀 것이다’라고. 세상은 변하고, 혼자서 꾸면 꿈에 머물지만 여럿이 함께 꾸는 꿈은 반드시 현실이 된다는 걸 실감하는 이 시대에서 바라보는 박완서 작품 속 주인공은 더 고맙고 애틋하게 다가온다. 고달프게 자신의 길을 걸어간 여성들이 있어 이 시대의 꿈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존경하는 큰 어른이 떠나신 빈자리가 큰 공백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선생이 남기신 꿈 줄기를 어루만지며 다시 힘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