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일 잘하자면 남 도움 잘 얻고 일 나눌 줄 알아야 한다”
의대 졸업후 도미, 86년 미 캘리포니아대 의대 소아심장과 정교수 돼

세계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한국여성들이 있다. 이들이 평생 커리어 발전 과정을 통해 익힌 귀중한 경험과일하는 여성의 노우하우를 알아보는 기획을 새롭게 시작한다.

 

<편집자 주>

정경자(57)씨는 현재 미국샌디에고 주재 캘리포니아 대학교 의과대학 소아심장과의 정교수로 있다. 1997년 ‘이화동창의 날’기념으로 열린 <세계 속의 한국 여성: 전망과 전략>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정경자 교수에게 소수민족으로서 미국인도 어려운 의대 교수가 되기까지의 삶과 성공의 비결에 대해 들어보았다.

- 신상 소개부터 해 달라.

“1942년 10월 2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집이 태능에서 과수원을 했다. 그 당시엔 경기도 화접리였고 화접국민학교를 졸업했다. 졸업생이 남녀합해 20명이었다. 그 후 서울사범대학부속중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이화여대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 한국말 액센트가 이북말 같다.

“(웃음)그런 말 전에도 들은 적 있다. 우리 부모님이 황해도 분들이셨다. 난 그곳에 가 본 적도 없는데 나이들수록 어머니와 목소리나 말투가 닮는 것 같다.

어머니는 황해도 도지사상을 받을 정도로 공부를 잘했고 조선인으로는 드물게 경성사범을 졸업하신 신여성이셨다. 그런데 언론인인 아버지와 결혼해서 나와 세 남동생을 낳아 키우시느라 실력 발휘를 못하셨다. 세 남동생들도 지금 모두 한국과 미국에서 의사이다.”

- 미국은 언제갔나?

“이대 의대를 졸업하고 바로 갔다. 졸업후 미국에서 인턴을 할 수 있는 시험(ECFMG: )외국인인턴선발 고사)을 보았는데 합격했다. 처음 간 데는 오하이오주에 있는 병원인데 거기서 1년 인턴했다. 인턴은 여러 과를 고루 도는 순환훈련제(rotationinternship)였다. 인턴 후 보스톤대학병원으로 옮겨 레지던트를 3년 했다. 레지던트때는 전문분야가 정해지는데 난 소아과를 했다. 사실 처음엔 내과를 가고 싶었다.”

- 내과는 힘들어서 안갔나?

“아니, 내과는 재미가 없었다. 그당시 내 나이가 24세정도 였는데 내과에는 노인 환자가 많았다. 지금은 노인학과가 따로 분리되어 있지만 그땐 내과 안에 노인학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소아과를 택했다.”

-소아과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고 한다. 더구나 대학병원의 소아과에 오는 환자들은 동네 병원에서 못 고치는 병들이라 대부분 가망이 없는 환자들이라 가슴 아픈 일도 많다고 한다.

“사실이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죽어가는 아이를 살려 놓으면 왕이 된 기분이다. 소아과에서는 많이 운다. 살아나면 기뻐서 울고, 아니면 애통해서 울고… 그러나 어린이들을 살려놓았을때의 보람은 말할 수 없이 큰 것이 또한 소아과의 매력이다.”

- 레지던트 하신 후에는?

“3년동안 뉴욕에 있는 로체스터 대학에서 휄로우(fellow)로 장학금을 받아 소아심장학을 연마했다.”

- 그러니 의대 6년, 인턴 1년, 레지던트 3년, 휄로우 3년해서 총 13년을 했나?

“그렇다. 그리고 위스콘신대학 조교수로 갔는데, 그때 나이가 만 30세였다. 미국에서는 의대가 8년 코스다. 그래서 나는 미국인들보다 2,3년이 빨랐다. 당시엔 내가 최고인 줄 알았다.”

- 미국의대는 예과가 4년인가?

“학부 4년이고 의과대학원이 4년이다. 학부에서는 아무 전공이나 해도 된다. 다만 의과대학에서 요구하는 과목, 즉 화학이나 심리학 등을 이수해서 성적이 좋아야 한다. 내가 캘리포니아대학에서 의대생 입학심사를 하는데 본래 의대를 작정하고 공부한 화학이나 생리학과 출신보다 역사학, 심리학, 경제학등 다른 학문을 하고 오는 학생들이 더 나았다. 원래 의대지망생들은 의사를 애초부터 직업으로 생각하고 시작했기 때문에 질문에 답은 정확하게 하지만 그 범위를 벗어나면 아는 것이 없다. 그러나 타과 전공 의대 지망생들은 사고가 폭이 넓다. 오랜생각 끝에 정말 의술을 베풀고 싶어오는 학생들이 많다. 그런 학생들이 결국 크게 된다.”

-교수직을 하자면 국적이 한국이라도 되나?

“1966년 인턴으로 도미할 때 5년짜리 J1비자였다. 그리고 5년이 되니까 J1비자를 모두 영주권으로 바꿔 주었다. 영주권을 가지고 3-4년있으면 큰 범죄가 없는 한 보통 미국 시민권이 나온다. 그래서 미국 국적을 가지게 되었다.”

- 결혼은 조교수때 하신 것으로 안다.

“그렇다. 남편은 현재 같은 샌디에고 캘리포니아 주립대의 신경방사선과와 MRI과장으로 있는 John Heffelink이다. 네덜란드계 이민자로 전형적인 미국 중부지방의 양키이다.(웃음)”

-체력관리는 어떻게 하는가?

“살이 찌면 체력이 줄어드니까 먹을 것을 줄인다. 매주 주중에 1번, 주말에 1번씩 남편과 테니스를 친다. 골프는 내가 성미가 급한데다 시간을 많이 잡아 먹어 안친다. 낚시도 세번 낚아 고기 안올라오면 와 버린다. 겨울엔 스키를 타는데, 테니스로 단련된 체력이라 잘 탄다.”

- 도와주는 분이 있는지?

“일주일에 1번 파출부가 와서 빨래와 청소와 다림질을 해준다. 정원 잔디깎기는 다른 사람이 해 준다. 젊을 땐 그런 여유가 없어 남편과 내가 다했다. 남편이 논문쓸 때는 내가 휴가를 내어 아이를 데리고 여행을 갔다. 내가 논문 쓸 땐 남편이 아이를 돌봐주었다. 하루는 남편 학과의 과장이 “자넨 아이 봐줄 아내가 없는가?”라고 물은 적이 있는데 그 때 남편의 대답이 두고두고 동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고 한다. Well, my wife needs a wife, too (제 아내도 아내가 필요한 사람이거든요)”라고 했다지 뭔가. 미국에선 그런 아빠를 ‘daddy-mom’이라고 한다.”

- 직장일도 만만치 않을 텐데….

“직급에 따라 다르다. 미국은 조교수때가 제일 힘들다. 매년 학회발표, 논문게재를 일정 수 이상 해야 하고 학생 지도하고 임상시술하고 정말로 바쁘다. 나는 이때 결혼과 출산이 겹쳐 정말 힘든 시절을 보냈다.”

- 몇년이 걸려야 부교수로 승진하나?

“4년 정도가 보통이다. 조교수에서 부교수 승진을 못하고 나가는 사람들도 많다. 일단 부교수만 되면 종신제로 들어서는 것이니 힘이 좀 덜 든다. 나는 남편이 보스턴의 하바드대학으로 가는 바람에 위스콘신대학에서 토프츠(Tofts) 대학으로 옮겨 조교수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81년에 캘리포니아대학에서 남편에게 과장자리를 제의해왔고 나도 부교수가 되었다. 토프츠에서도 내가 일을 잘하고 윗사람도 잘 섬겨서 계속 남아줄 것을 부탁했었다. 그러나 항상 새로운 기회를 찾아 떠나는 것이 미국의 생활이다. 캘리포니아대학에선 1986년에 정교수가 되었다.”

-그처럼 훌륭한 직장 생활을 하는 비결은 무엇인가?

“첫째, 지적능력이 있어야 한다. 둘째, 심신이 강해야 한다. 셋째, 노동 윤리가 있어야 한다. 즉 책임감이 있고, 부지런해야 좋은 결과를 얻을수 있다. 넷째, 동기(strong motivation)가 분명하고 헌신성(high devotionto the job)이 강해야 한다. 누가 시켜서, 부모가 원해서 한다면 끝까지 못 해낸다. 다섯째, 사고와 일처리가 조직화되어 있어야 한다. 즉 일이 밀어닥칠 때 우선 순위별로 처리할 줄 알고, 남들과 일을 나눌 줄도 알아야 한다. 여성이 일을 잘하자면 남의 도움을 잘 얻고 일을 나눌줄 알아야 한다. 도와줄줄 아는 남편, 가사노동과 육아보조원 등이 필요하다. 물론 직장에서도 일을 나눠서 할줄 알아야 한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