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으로 몸바친 12년, 보람차고 의미있었던 시간들
여군경험 자부심과 자신감 심어줘 사회활동에 헌신할 수 있는 바탕돼

5.16이 일어나던 해인 1961년, 나는 그때 여군 훈련소 소장으로 재임하고 있었다. 여군들을 위한, 여군에게 꼭 필요한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던 나는 10년도 채 안된 초창기라고는 하나 수도 적고 역할도 뚜렷하지 않아희소가치로만 인정받고 있는 여군들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해 모범여군을 선발하고 표창하는 행사를 대대적으로 펼치기로 하였다. 그 이야기가 나오자 사방에서 격려를 해주었다.

여군 사기진작 위해

모범사병 선발대회 열어

나는 우선 복무 성적이 우수하고 마음씨 곱고 항상 단정한 모범사병을 심사를 거쳐 뽑았다. 국군신문에도 홍보가되었고 호응도가 무척이나 높았다.그러자 전군에서 축하편지가 매일 수백통씩 날라왔다. 그중에는 멋진 여군과 데이트를 하고 싶다는 연애 편지도 수두룩했다. 한때 그 행사가 ‘미스 여군’으로 이상하게 변질되기도 하였지만 처음에는 참 좋은 의도로 시작된 것이었다. 전국을 돌며 무의탁 사병을 위안하는 일에도 신경을 썼으며 여군 창설 기념일에는 여군들의 부모와 가족들을 서빙고에 있는 여군 훈련소로 초청하여 견학을 하게 하고 점심 대접을 하였다.또 오후에는 각 군대항 운동회를 열어 배구 축구는 물론 타자 경기도 하였다.

일본의 아사히 신문 등 한국여군에 대해 관심이 많은 외국기자들은 우리가 행사를 할 때 마다 와서 취재하였고, 주한 영국 대사관에서도 한국 여군을 방문하였다. 그들이 전해준, 영국 여왕도 여군 출신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무척 고무적인 것이었다. 이렇듯 마음을 다하여 후배들을 위해 일하는 것을 그들도 알았던지 나는 가는 곳마다 인기 투표를 하면 1등으로 뽑혔고‘어머니같은 여군’이란 소리를 많이 들었다. 그럴 때 마다 내 마음과 뜻을 알아주는 것이 고마와서 ‘더 열심히 일 해야지’다짐하곤 하였다.

10년 간의 군생활이 아무래도 힘이 들었던 것일까. 건강만큼은 자신있던 내가 돌연 육군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병명은 췌장염. 3개월간 병상에 누워있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 퇴원 후 나는 다시 대구로 발령받아 여군 과장으로 2년동안 복무하였다. 그후 1964년 갓 마흔이 되던 해에 중령 10년 인사법에 해당이 되어 첫번째로 예편하게 되었다. 무엇인가 할 일을 다하지 못한 것 같은 아쉬움도 있었지만 후진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서는 내가 일보 후퇴하는 것이 더 좋겠다는 판단이 서 기거이 군복을 벗을 수 있었다.

‘여군 출신이라 다르다’로

멋진 여성집단으로 인정받길

여군 생활은 나의 젊음과 충성심을 다 바쳐 나라와 겨레를 위해 봉사한 것이었다. 나의 현역 당시 군번은 ‘17663번’·1766은 여군이니 여군으로서는 세번째로 빠른 군번이었다. 20대의 꽃다운 나이로 현역 군인이 되어 헌신한 12년, 입대 2년만에 중령이 되고 나서 10년이 지나 퇴임할 때까지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학도 호국단 배속 장교로 출발하여 고된 군사 훈련을 받던 일, 신분증이 없어 인민군으로 오해받고 죽을 뻔 했던 일, 또 신분증 때문에 탈영병으로 오인되어 총살 당할 뻔 했던 일, 그후 여군을 바로 세우기 위해 발령 받은 곳마다 가서는 여군들이 남군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책임을 완수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애썼던 일들….

나는 지금도 내가 여군이었던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리고 다른 후배 여군들도 자신이 많은 여성 중에서 택함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영광스럽고 자랑스럽게 여겨 명예욕이나 남에게 조롱거리가 될 콧대 높은 자만심에 사로 잡히지 말고 겸손하게 임무수행에 정진해 주길 당부한다. 그리하여 여군이 멋있는여성집단으로 자존심을 가진 자랑거리가 되어지기를 바란다. 지극히 작은 일 하나에라도 최선을 다하여 ‘여군 출신이라 어딘가 다르다’라는 칭찬을 들을 수 있다면 대한민국 여군 창설에 초석이 된 나로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하겠다. 내 경우를 보더라도 십여년간의 군대 생활이 모든 것의 기초가 되었고, 어떤 일을 하더라고 계획에서부터 실천까지 책임있게 완수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기게 하여 주었다고 생각한다. 또 여성도 남성에 비교해서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아니 오히려 남성이 못하는 일까지도 여성이기에 해낼수 있다고 믿는다.

인간은 얼마든지 훈련을 통해서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려운 과정을 겪으면서 새사람이 된다. 하나님께선 당신의 자녀를 정금같이 만들기 위해 단련시키신다고 하였는데 나 역시도 그런 훈련과정을 거쳐 새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을 여러번 겅험하였다. 그 크신 사랑으로 인해 나는 군 생활중에도 군 교회에 꼭 출석하였고, 어느 곳에서나 내가 지휘관을 할 때는 천막을 치고라도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면서 하나님께 늘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를 쉬지 않았다. 그러면서 처음에는 ‘내가 마음만 단단히 먹으면 불가능은 없다’고 생각하던 것이 ‘하나님이 주신 능력 안에서 불가능이 없다’로 바뀌게 되었다. 또 ‘내가아니면 안된다’던생각에서 ‘누구에게나 주어진 달란트가 있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내가 마치 정의의 척도인 양 불의를 보면 용서치 못하던 마음도 ‘심판권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군복을 벗으면서 잠시 <대한여자 청년단> 단장직을 맡았었다. 중앙대 총장을 지내 신임영신씨가 ‘젊은 여성들에게 올바른 민족관과 국가관을 세워주자’는 목적에서 설립한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정치적인 색채가 짙어져 나와는 맞지가 않아 사임하였다. 이어 나는 대림동에 있던 <영진직업보도학교>에서 재단이사로서 7년간 자원봉사를 하게 되었다. 전쟁 중에 부모를 잃은 14세에서 21세까지의 여자아이들 1백여명에게 어머니 노릇을 해주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가정을 모르는 아이들이므로 그 아이들에게 가정교육을 가르쳤고, 성경공부, 예절, 어학 등 내게 있는 능력은 다 그들에게 쏟아부었다. 또 그들의 정서 함양을 위해 조화 만드는 것을 배워 가르치기도 하였다.

퇴역 후엔 <사랑의집>등

사회봉사와 교회활동에 헌신

본시 일을 찾아 만드는 나는 학교 일을 돌보는 가운데서도 교회 일로 동분서주하였다. 그 당시 내가 출석하는 정동 제일 교회에서는 목동 판자촌에 <사랑의 집>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내가 그곳 위원장을 겸임하고 있었다. <사랑의 집>에서 한 일은 판자집 2천 세대를 대상으로 사무실을 개설하여 거의 무상으로 의식주를 제공하면서 빈민을 구제하는 동시에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었다. 공장에서 원가로 사온 삼양라면을 원가 그대로 공급하고, 그들의 자존심을 존중하여 교회에서 모은 생필품과 헌옷들을 한벌에 백원씩 팔았는데 얼마나 좋아들 하던지, 그때의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렇게 2~3년간 씨를 뿌리면서 얻은 결신자들이 40명이나 모여 속회를 드리게 되었으나 애석하게도 철거 작업으로 인하여 중단하게 되었다. 그때 그곳에 살던 사람들 일부가 오응진 신부님이 운영하시는 꽃동네로 이사를 갔다. 이런 와중에 7년의 세울이 흐르면서 사정상 <영진직업보도학교>도 폐교되었다.

이후 1979년 부터는 감리교 여선교회 선교회관 초대 관장직을 맡게 되었다. 나는 전국여선교회 회원들이 회관에 와서 신앙의 재훈련과 여성으로서 갖추어야 할 모든 교양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작성하였다. 김옥라 장로님과 함께 <삶과 죽음에 대한 문화>라는 모임을 만들었으며 합창단을 만들어 김자경 선생님과 열심히 노래도 하였다. 은준관목사님을 모시고 하던 성경공부는 매번 인원이 1백명이 넘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선교를 목적으로 한 서예반도 만들었는데 대만까지 가서 전시회를 열 정도로 실력들이 대단하였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