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물질보다 더 가치 있게 생각하는 사회로
"에코 페미니즘이 대안이다"

‘페미니즘’이 대중화된 지 오래다. 요즘엔 오히려 역풍 현상이 때론 공격적으로, 때론 풍자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1984년 이래 국내 최초의 여성학과 교수로, 한국의 대표적인 페미니스트로 활동해온 장필화 교수가 전망하는 여성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인도풍으로 꾸며진 아기자기한 연구실에서 만난 장 교수는 말했다. 더 이상 여성부가 필요없는 그 날이 진정한 남녀평등의 시대가 아니겠느냐는 말도 있지만, 같은 논리에서 전쟁이 사라질 때 함께 사라질 국방부보다 여성부가 더 오래 갈 것 같지 않느냐고. 그만큼 여성과 남성의 역학관계에서 생기는 문제는 전쟁 이상의 질긴 역사적 뿌리를 갖고 있다는 말로 받아들여졌다.

장 교수가 생각하는 여성학과 여성주의의 미래는 휴머니즘의 맹점을 극복한 ‘에코 페미니즘’이다. 휴머니즘은 인간 중심주의라서 다른 생태계의 생명체를 도구화하고 정복하는 어두운 면도 지닌 반면, 에코 페미니즘은 만물의 ‘생명’에 초점을 맞춘 대안적 패러다임에 집중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장필화 교수 ⓒ여성신문
장필화 교수 ⓒ여성신문

‘여성’ 넘어 ‘성주류화’

‘성인지’로 사회 들여다봐야

-여성학의 관심 분야가 점점 다양해지고 넓어지고 있는 것 자체가 여성문제의 다양화를 말하는 것 같다.

“그건 당연하다. 영화 등 문화 쪽에 관심이 많은가 하면 또 여전히 노조와 같은 전통적인 문제의 대안에도 관심이 많다. 여성귀농, 사회적 기업, 비정규직 여성노조, 지역사회 실천인문학을 통해 지역 여성운동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논문도 나왔다. 이런 것이 발전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다양성의 일례로 성 인지 의학을 들 수 있다. 가령, 아스피린 복용에 있어서도 심장의 작용이 남성과 여성이 차이가 나는 등 여성과 남성의 몸 구조가 엄연히 다른데도 남성의 몸을 모델로 해서 임상실험을 하고, 남성의 몸에서 유추한 몸무게 비중으로 소아의 처방량을 정하는데, 이런 건 사실 위험한 일 아닌가. 여성주의가 확산되고, 의학계에 진입한 여성들이 실제로 늘어나고 있기에 남성 중심적 의학 사고에 문제 제기를 할 수 있게 되고, 관련 정책도 만들어내는 토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 여성문제를 얘기할 때 ‘여성’이란 말보다 ‘성 주류화’ ‘성 인지’란 말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될 때가 많다.

“‘성 주류화’ ‘성 인지’란 용어는 여성·남성 문제를 떠나 사회 모든 분야, 모든 문제에 들이대도 모두 해석이 가능하다. 그게 여성주의든, 여성학적인 것이든 어떤 시각을 갖게 되면 분석할 수 있는 대상은 무궁무진하다.

또 ‘왜 여성은 이걸 못할까’라든지 ‘왜 여성에게 이건 허락되지 않을까’하는, 오래 전부터 여성들이 가졌던 의문은 ‘인간은 왜 죽어야할까”라는 근원적인 질문과 다르지 않다. 때문에 여성학과 관련을 갖지 않는 분야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성주의와 여성학을 한다는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하는 끊임없는 도전인 것 같다. 그런데도 지금과 같은 시대에 여성운동이 꼭 필요한가란 회의적 반응도 있다.

“시각을 세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여성학은 분명한 물음에서 출발한다. 여성과 남성의 차이가 역사적으로, 문화인류학적으로, 철학적으로 어떻게 변천해왔는가 하는 물음이다. ‘여성 억압’이란 역사가 실존했고, 그 상황과 현실을 이해하고자 하는 데서 출발했다.

과거 조선 시대, 의식 있는 여성들은 ‘왜 여성들은 이렇게 살아야 할까’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바로 여성학적 문제 제기다. 그러나 당시는 이것이 개인적인 문제 제기에 그쳤을 뿐이다. 시대적 상황 때문이다. 서양은 19세기 후반에 여성 교육을 시작하면서 ‘그래, 여성도 할 수 있어~’라는 생각은 있었지만 이것이 제도화되진 않았다. 몇몇 선구자들을 중심으로 여성참정권을 획득하고 나서는 ‘이제, 여성운동은 필요 없다’는 생각도 나왔을 거다. 우리나라에서 호주제가 폐지됐을 때처럼.”

‘왜 여성은 이걸 못 할까’는 인간 본연의 질문

-‘여성의 시선’으로 남성을 바라보면 당연시되던 기존 통념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남성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남성은 왜 울면 안 되나, 남성들은 전쟁에서 꼭 용맹함을 보여줘야 하나 등 통념상 남성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들이 점점 다양하게 늘어나고 있다. 사실, 탤런트 최수종처럼 아기자기하게 뜨개질 하는 것을 좋아하는 남성도 많다. 감성을 가진 예술가 중에도 남성들이 많다. 남성들은 통념이 암시하듯 감정 억제를 꼭 해야만 남성다운 것인가. 전혀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여성학을 여성만이 하는, 여성만을 위한 학문으로 단순히 규정할 수 없을 것 같다.

“여성학은 ‘숨죽이고 살아온 남성들’에 대해서도 젠더(gender)적 틀에서 문제를 제기한다. 이런 면에서 여성학은 생리학 해부학 등 기초의학처럼 굉장히 종합적인 접근을 해야 하고, 특정 학문과의 매치가 쉽지 않다. 따라서 여성학을 특정 학문 분야로 묶어 놓기엔 문제가 있다. 여성학은 지극히 사적인 문제를 다루기도 한다. 성적인 문제, 가족문제, 관계의 문제, 더 나아가 무의식적인 꿈, 어렸을 때의 사회화 과정, 영성, 임파워먼트(empowerment)까지 포함하기에 철학, 문화, 정치, 역사, 사회학 등의 학문이 모두  포괄적으로 포함된다.

그래서 여성학은 엄청난 과제를 안고 있다. 그에 반해 여성학을 연구하는 인구는 아직 너무 적다. 학부에 여성학을 전공하는 제도가 마련되어 있지 않아 학문 인구가 확대되기 굉장히 어려운 현실이다.”

‘여성의 눈’으로 ‘숨 죽이고 살아온 남성’도 바라봐야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고 목소리가 커지면서 이런 저런 모습으로 나타나는 역차별 현상을 어떻게 보는가.

“역풍은 다양한 차원에서 이야기 되어야 할 것 같다. 여성들은 어머니이기도 하고 누나이기도 하고 애인이기도 하고 아내이기도 하다. 그럴 때 정말 각자 개인의 차원에서 가장 신중해야 하고 성찰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살고 있는데, 그 관계 속에서 너무 자기중심적인 것은 남성일 때도 문제고 여성일 때도 문제다. 우리 사회는 너무 상대적 평가에 익숙해 남성을 하나의 근거 기준으로 해서 그것에 빗댄 상대 집단인 여성을 판단해왔다. 이렇게 할 때 남성과 여성 둘 다 행복해질까.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것에 대해 여성을 비난하거나 스스로 목소리를 내는 여성들을 재단하면서 ‘다 여성주의자들 탓이야’라고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

과연 평등이란 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했는가, 남성을 기준으로 할 때 여성이 하고자 하는 그것이 과연 평등한 것인가, 이런 질문에 대한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여성주의의 기본은 인간답게,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받으며 상대적 인권, 평등, 권리를 누리는 것이다.”

-저출산율 현상에 대해 지금까지 사회가 여성들을 대해온 방식에 대해 여성들이 파업을 일으킨 것이라 보는 시각도 있다.

“우리 사회는 물질적으로 크게 성장했고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같은 경제성장 뒤에 보이지 않는 여성들의 역할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보지 않으려 하면 앞으로의 발전에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 중 대표적인 현상이 저출산 아닐까. 저출산 문제 해결의 방법은 지금과 같은 방식으론 안 된다. 인간을 만들어내고 양육한다는 것에 대해 물질보다 더 귀하게 생각하는 가치의 전환이 생기지 않으면 저출산 문제는 지속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실에선 가치전환을 중점적으로 하기 보다는 돈 몇 푼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결혼제도 안에서 벗어난 미혼모에 대한 낙태를 금지만 할 것이 아니라, 이 미혼모들이 그래도 아이를 기를 수 있는 지원을 만들어 놓고 인프라를 만든 다음, 낙태에 대한 선택의 여지를 주고 이 문제를 이야기해야 한다. 맹목적으로 생명만을 중요시한 낙태금지는 효과가 없을 것이다.”

-1980∼90년대 페미니즘에 비해 지금의 페미니즘은 세대 차이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다.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좋은 학교 다니고 좋은 직장에 취직해 사회 주류에 들어가야 한다는 압력이 크고, 거기서 오는 경쟁이 엄청나게 커서 굉장한 스트레스를 가지고 사는 젊은이들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전혀 다른 ‘게임’을 하는 젊은이들이 있어 영역이 넓어졌다. 자유를 무대로 자신이 추구하는 계획, 취미, 탐험 등과 같은 것들이 외국, 농촌, 새로운 보컬그룹, 영화 찍기 등 굉장히 넓은 스펙트럼으로 나타난다. 우리 세대만 해도 물질적인 한계가 있었지만, 물질적으로 풍요한 지금은 젊은이들의 선택의 폭이 굉장히 넓어졌다. 이들 젊은이들에겐 도전해보겠다는 자신감도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 결국 주류 사회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결단과 불안함이 함께 한다. 이는 남녀 모두 마찬가지다. 이런 성향 때문에 그들은 페미니스트적 경향이 짙다.”

-여성학, 그리고 여성주의의 미래를 어디에 두는가.

“휴머니즘의 맹점은 인간중심주의다. 그래서 다른 생태계의 생명체를 도구화하고 정복하는 어두운 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에코 페미니즘, 즉 생태 여성주의나 생명 여성주의, 혹은 여성 생명주의로 해석되는데, 이것이 제시하는 대안적 패러다임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자연 현상인 기후변화도 계급과 성별 분업화와 관련이 있다. 일례로, 쓰나미가 덮쳤을 때 여성 사망률이 더 높았던 것은, 여성들이 항상 어린아이와 병약자를 돌보아왔기에, 혼자 살려고 뛸 수 없는 상황에 있었다는 환경과 밀접해 있다. 이처럼 돌보는 이로서의 여성은 기후변화나 생태계의 변화에서 더 많은 고통을 겪게 된다. 사막에 깊이 파이프를 박아 물을 퍼올리는 사업을 생각해보자. 그렇게 되면 그동안 우물물에 의존하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대부분이 여성들인 이들은 더 먼 곳으로 물을 길러 가는 고생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부익부 빈익빈의 차별은 직접적으로 여성에게 영향을 끼친다. 그래서 환경문제를 이야기 할 때 쓰레기 문제 등의 피상적인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보다 근원적인 문제를 보지 못하게 하는 부작용을 일으킨다.”

‘주류’ 압박에서 벗어나 선택과 기회의 폭을 크게 넓혀라

-우리 여성학의 세계적 위상이 크게 높아진 ‘사건’으로 2005년 서울에서 열린 제9차 세계여성학대회를 꼽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조직위원장으로서 대회의 성공 요인을 무엇이라 보는가. 또 이것이 여성들에게 시사하는 것이 있다면.

“2008년 스페인에서 열린 세계여성학대회에서도 한국 대회 얘기가 많이 나왔고, 2011년 캐나다에서 열릴 대회를 위해선 관계자들이 이대를 다녀갔을 정도다. 대회 성공 요인에 대해 질문을 많이 받곤 하는데, 난 한마디로 ‘한국 여성의 저력’이라 답한다. 대회 준비 과정마다 드러나곤 하는.

우린 모든 것을 하나하나 꼼꼼히 다 상의하는 과정을 거쳤다. 일례로, 기념품 가방의 경우 두 시간에 거쳐 열 명이 토론에 토론을 거듭해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두 가지 종류를 다 채택했다. 당시 컨벤션 회사는 다른 학회에선 이렇게 비효율적으로 하지 않는다며 경악을 금치 못했는데, 결과적으론 5년 후인 지금까지도 당시 기념품 가방에 대한 만족도는 높다. 

이를 통해 밖에서 보여지는 효율성보다는 여러 사람들의 참여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세계여성학대회를 일회성 잔치 차원에서가 아니라 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을 통해 함께 협력하고 함께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체험을 공유했다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과정이 좋았기에 결과도 좋을 수밖에 없었다.“

장필화 교수는

1984년 이화여대 대학원 여성학과 교수로 부임하면서 ‘국내 최초의 여성학과 교수’로 자리매김 했다. 2002년엔 이대 여성학과 20주년을 맞아 기념사업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약했다. 이화여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후 1974년부터 1980년까지 크리스챤아카데미 여성사회 간사로 활동했고, 이후 영국으로 유학, 1988년 서섹스대에서 박사학위(여성과 발전)를 취득했다. 이화여대에서 교편을 잡은 후엔 한국여성연구소 소장, 아시아여성학센터 소장, 한국여성연구원 원장, 이화여대대학원장 등을 역임했다. 대외적으론 2000년 한국여성학회 회장을 비롯, 2005년 제9차 세계여성학대회 조직위원장, 2007년 아시아여성학회 초대 회장, 2008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조직위원장 등으로 주목을 받았다. 특히 1999년부터 2001년까지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여성자문기구(AGGI) 초대 의장으로 활동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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