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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운서 지망생인 미회와 함께 방송국 로비에 들어서던 민홍은 기가 질

리는 바람에 실소를 터뜨렸다. 로비 입구는 발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로

취업 지망생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전파매체의 발달로 인해서

방송사가 최고의 인기직종으로 부상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치

열한 취업현장을 목도하자 민홍은 와락 겁부터 났다. 경쟁에서 이길 자신

이 도통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얘, 아나운서 응시 창구에 입사 지원서를 내고 올테니 조금 뒤에 만나.

목이 움츠러든 민홍을 향해서 득의양양하게 웃어 준 미회는 급히 친구의

곁을 떠났다. 그녀는 신문사의 중견 언론인으로 일하는 아버지의 지기(知

己)나 아니면 그 방송국에서 일한다는 인척이라도 찾아가는 걸까. 매정하

게 돌아서는 친구를 고까워할 계재도 아닌지라 민홍은 쓴웃음을 지으며

입사 응시 지원서를 받는 대열에 끼어 들었다. 삼십분을 기다린 뒤에 입

사 지원서를 간신히 손에 쥔 그녀는 복도 구석에 앉아서 지원서의 빈 칸

을 메우느라 한동안 씨름을 한 뒤 가까스로 창구에 지원서를 접수시켰다.

휴우! 드디어 시험은 치를 수 있게 됐다 싶어 안도의 숨을 내쉬며 그녀가

현관各막?발길을 돌렸을 때였다. “백민홍씨”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창구 직원이 응시서류를 치켜든 채 그녀를 찾고 있었다.

“백민홍씨세요? 이 원서는 접수할 수 없습니다.”

“왜요?”

그가 게시판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남자만이 피디(PD) 시험을 응시할수

있을 뿐 여자는 아나운서직이나 전산등 다른 직종에 응시할 수 있다는 것

이었다.

“저는 피디가 되고 싶은데요.”

“그건 댁의 요망사항이겠죠. 방송국은 요즈음 거의 다 여자 피디는 안

뽑아요.”

“그건 남녀 고용평등법에 저촉되는 것 아녜요? 제 서류를 접수해 주세

요.”

“우린 방송사 내규를 따를 뿐이예요. 다른 분을 위해서 자리를 비켜 주

십쇼.”

창구 직원은 그녀의 응시지원서를 창구 밖으로 떼밀어 놓고는 다음 사람

의 원서를 접수했다. 이건 좀 너무하다 싶었으나 한갓 인사과 사원에게

대들 문제도 아닌지라 민홍은 자괴심에 낯을 붉힌 채 엉거주춤 서 있었

다. 바로 그때 그녀를 거칠게 밀어 붙이며 창구앞으로 다가서는 남자가

있었다.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저는 아직 담당자와 얘기가 끝나지 않았는데요.”

“이 언니 고집 한번 되게 쎄네. 남들 생각도 좀 해야 하쟎소?”

복학생인 듯 나이가 들어보이는 남자 지원자가 그녀를 흘겨 보았다.

“고집 때문에 이러는 게 아녜요. 사람에 대한 편견은 시정되어야 하쟎아

요?”

남성 시청자를 끌기 위해서 성적 매력이 대단한 여성 연예인을 동원하기

일쑤인 방송사측의 여성 인력에 대한 모순된 인사 정책과 ‘어깨’의 곱

잖은 눈길이 하나로 겹치자 민홍은 자존심이 상했다. 그녀가 거부당한 씁

쓸함 탓이었다.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며 투덜대는 ‘어깨’를 무시한

채 민홍은 그대로 돌아서기가 억울했기에 응시 기회를 달라고 직원에게

다시금 간청했다. 합격만 한다면 경영진에게 호소해볼 수도 있겠거니 싶

어서였다.

“학생, 한때는 방송사들에도 여자 피디들이 있었지만 프로를 기획하랴,

출연자 섭외하랴 엔지니어들과도 손발을 맞추랴 힘에 부치다보니 자연 도

태했단 말이요.”

그러나 무능력한 여자 피디 몇명때문에 여성 전체에게 취업기회를 아예

차단해버린 방송사의 경직된 방침이 아쉽기만 했다. 더우기 울고 싶은 김

에 덜미를 나꿔채는 겪인 ‘어깨’는 물론이고 이들의 대치극을 방관하고

있는 다른 지원생틈에 끼어 있는 자신이 이방인처럼 느껴졌다. 분노의 출

구를 찾지 못한 채 그녀는 현관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누군가의 조소가

그녀의 귓전에 날아와 앉았다.

“까짓 것, 억울하면 방송국을 하나 차리든가 아님 성전환 수술이라도 하

든가.”

‘어깨’의 비아냥에 남자 지원자들이 와르르 폭소했다. 민홍은 수치심에

전신이 뜨겁게 달아 올랐다. 그러나 민홍은 고개를 저었다. 이들중 어느

누구도 그녀의 진정한 적이 아니었기에, 그 방송사나 ‘어깨’나 방관자

격인 남자 지원자들 모두는 다만 구조적으로 굳혀진 여성 능력과 인권에

대한 편견을 그대로 고수하는 인습과 고정관념의 희생자들에 불과했기 때

문이었다.

민홍은 패배감을 가눌 셈으로 어깨를 곧추 세우고는 주위를 돌아 보았다.

다른 지원자들은 그녀가 벌였던 작은 해프닝쯤은 잊은 듯 일사분란하게

지원서를 접수시키고 있었다. 그녀는 타인을 향한 젊은이들의 무관심에

섬뜩한 한기를 느꼈다. 사회정의와 인권 그리고 민주화를 위한 시민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짓밟았던 역대 군사정권의 통치행태는 이웃에 대한 젊은

이들의 진솔한 관심마저송두리째 앗아간 걸까. 민홍은 고개를 내저었다.

하기야 5년전에 터졌던 광주항쟁의 원인 규명과 민주화를 외치는 대학생

들의 입에 국가보안법이라는 재갈을 물렸던 군부지도자들은 시민들이 죽

어간 사건마저 ‘강건너 불’로 인식하도록 국민들을 세뇌시켜 왔을진데

그들 취업 지망생들을 탓한들 무엇하랴 싶었다.

통치권자들은 정녕 모를 것이었다. 그들의 아전인수격인 통치관과 인간관

이 사람들로 하여금 피차 불신하도록 그리하여 그들을 기득권자와 소외계

층으로 그리고 남자와 여자로 분리시켰음을. 또한 그들 통치자들은 ‘미

셀 푸코’의 지적처럼 그들의 통치와 감시체제를 통해서 ‘개인을 원자처

럼 분리시키며 타자와의 연결고리를 파괴해’버렸다는 사실 조차도 영원

히 인정하지 않을 것이었다.

민홍은 방송사 로비를 나서기 직전 입사응시지원서를 휴지통에 버리는 것

으로 겨우 울분을 삭이고는 방송사 건물을 나섰다. 도서관으로 돌아가서

취업공부를 하는 것 외에는 달리 묘수가 없을 것이었다. 그때 다가서는

여학생이 있었다.

“홀로 고군분투하느라 수고 많으셨죠. 잠깐만 시간을 내실 수 있으세요?

검은테 안경탓에 지적(知的)으로 보이는 여학생이 보도옆 찻집을 가르켰

다.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는 여학우들끼리 함께 차나 마시려구요.”

그녀는 자신을 ‘○여대 신?轢徘筠돛?이수은’이라고 소개하고는 그녀

역시 응시제한 규정에 밀려서 되돌아 나오다가 다른 여자 친구들을 만난

김에 찻집에 모이게 되었노라는 것이었다. 민홍은 이수은의 뒤를 따라 나

섰다.

“어머. 백민홍! 너도 왔었어? 참, 연구소 간사직 남자애한테 뺏겼다면서?

찻집에서 큰 소리로 민홍을 반기는 친구는 민홍의 고교와 대학동창생인

우순자였다. 고교시절 학교 신문편집장으로 필명을 날렸기에 ‘우수한 수

다장이양’이의 줄임말인 ‘우수양’이라는 별명으로 더 잘 통했던 단짝

을 엉뚱한 곳에서 만나자 민홍은 친구가 무척 반가웠다. 자신도 당했노라

며 분통을 터뜨린 우수양은 이수은과는 신문학과 학회 세미나에서 만났던

사이라고 민홍에게 설명해 주었다.

“사람의 능력을 창의력이나 경험이 아니라 성(性)으로 저울질하는 건 인

권과 생존권마저 짓밟는 범법행위에 진배없잖니? 어떻게 했으면 좋겠니?

민홍아?”

자기네 대학 문과대 수석이었노라며 민홍을 자랑스레 소개한 우수양은 신

선한 대책을 제시하도록 민홍을 채근했다. 그들끼리는 이미 얘기가 오간

모양이었다.

“차별조항의 부당성은 논할 여지도 없고. ‘여성은 무능하니까 채용이

되어도 자연도태된다’던데 굳이 차별조항을 못박아서 여성들의 반감을

사는 방송사측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어. 그렇다면 각 대학 신문방송학과

학생과 교수진들이 힘을 합쳐서 대학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이 문제를 언

론사에 제기해보면 어떨까.”

“그래. 전국 신방과 여학생과 교수진에게 여학생을 위한 평등한 취업기

회를 보장해주도록 언론사와 여론에 호소하는 건의서를 보내도록 우리가

제안하자.”

민홍의 제안에 이어서 이수은이 대안을 제시하자 모두들 공감을 표시했

다.

“문서상의 항의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나서서 직접 여론에 호소하면 어떨

까?”

고교시절 교내 자판기 수익금의 사용처를 밝히도록 학교당국에 촉구하는

대자보를 붙였다가 정학을 당할 뻔했던 우수양이 ‘항의책을 제시하자 침

묵시위를 하자’는 등 제안을 만발했다. 간혹 웃음소리도 들렸다. 해결책

이 보이기 때문일까. 우수양이 대책위를 구성하자고 나서자 이수은 등은

즉시 신문방송학과가 있는 전국대학교 리스트를 적었다. 편견의 벽을 절

감한 여학생들은 이제 인권과 생존권을 되찾기 위한 노력에 박차를 가하

고 있었다. 그들의 상기된 모습이 사회학도인 민홍의 눈에는 무척 틘㎢?

게 보였다. 민홍은 시계를 보았다. 다섯시였다.

이제 해결책을 위한 기본방향과 실천방법이 제시된 터인지라 그녀는 자리

를 떠도 될 성 싶었다. 더욱이 방송사 입사기회가 차단된 마당에 그녀는

또 다른 취업 기회를 모색해야 했다. 그녀는 침묵 시위 날짜가 잡히는대

로 알려달라고 부탁한 즉시 잰 걸음으로 찻집을 나섰다. 가야할 길이 멀

게만 느껴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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