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길 행정자치부 장관은 딸부자이다. 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전
공하고 있는 큰딸, 고등학교 3학년인 둘째딸 그리고 중학교 1학년인
셋째딸이 있다. 딸만 많은 것도 아니다. 15살, 7살 아들도 둘이다. 늦
둥이 막내와 함께 걸어가면 이웃 사람들이 할아버지와 손자같다고도
하지만 김 장관은 주위의 시선에 상관없이 즐겁기만 하다고 한다.
지난 10월 8일 세종로 정부청사에서 만난 김정길 행자부 장관은
‘페미니스트’를 자처했다. 밤낮 가릴 것 없이 바쁘게 살아왔지만
휴일엔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걸 철칙으로 삼으면서 아내를 ‘모
셔왔다’며 이만하면 페미니스트가 아니냐고 오히려 반문했다. 지난
추석에도 아내를 ‘모시고’영화〈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관람했다
는 김 장관은 틈만 나면
아내의 장바구니를 들고 시장나들이를 즐긴다고 귀띔했다.
여성을 위해 한 일 가운데 가장 큰 자랑거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엔
“딸을 셋이나 낳은 것”이라며 “이 딸들이 활개치는 세상이 왔으
면 하는 것이 바람”이라고 덧붙였다.
또 김 장관은“사법시험에도 여성할당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
했다. 아직 구체적으로 검토중인 사안은 아니라는 전제를 달았지만
여성문제를 대다수가 남성인 판검사가 다루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는 것이 그의 소신이었다. 현재 추진중인 군가산점 제도에 대해서는
김 장관도 “가산점이 너무 많다”며 “2천년경 다시 검토할 것”이
라고 밝혔다. 다음은 일문일답.
-군가산점 제도가 여성과 장애인을 결과적으로 차별한다는 점에서
평등권에 위배된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일부에서는 헌법소원까지 불
사하겠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데요.
“솔직히 저도 군가산점에 찬성 안합니다. 가산점을 준다 하더라도
절대적인 영향을 안 줄 정도면 모르지만 지금 추진중인 제도로는 좀
많아요. 가산점 제도보다는 군에서 복무한 경력을 공직에 들어왔을
때 인정해주는 정도로 하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성채용목표제
가 끝나는 2천년에 다시 합리적으로 조정이 될 겁니다. 2천년에 다
시 조정한다는 건 가산점이 너무 많다는 것을 전제로 한 거에요”
-우리나라의 여성관련 법과 제도는 상당부분 진전을 이뤘다는 평가
를 받습니다. 하지만 실질적인 여성평등지수나 권한척도는 다른 나
라와 비교해 볼 때 상당히 떨어집니다. 이런 갭을 메꾸기 위해 어떤
노력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어디든 상위직에 여성은 소수입니다. 행정부의 경우도 관리직은
3%도 안됩니다. 그래서 저희 부처에서 여성공직자 우대정책을 펴는
것 아니겠습니까. 할당비율도 앞당겼어요. 상위직급에 여성의 비중을
늘리도록 여성공무원발전계획을 조만간 완료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
직 구체적으로 검토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판검사의 경우도 여성
이 일정부분 차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봐요. 사법고시에도 여
성할당제를 도입하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사법고시의 경우 전문적인 능력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반대 의
견도 만만치 않을텐데요.
“물론 기본적인 자질과 지식은 있어야지요. 다만 사법고시가 법전
조항 몇개를 더 잘 안다고 해서 전부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성권익과 관련한 사법문제는 여성 판검사가 많이 나와야지 실질적
으로 나아지는 거 아니겠느냐 하는 거에요.
전부 남성들이 남성적인 시각만 가지고 여성문제를 재단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지금 당장은 안되더라도 앞으로는 사시에도 여
성할당제가 필요하지 않겠나 하는 겁니다. 한번에 너무 많이 힘들다
면 점진적으로 넓혀 나가는 거지요. 장기적으로 30% 정도는 여성판
검사가 나와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이에 관해 조금 지나서 문제
제기 해볼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대략 언제쯤 할당제가 도입되는 겁니까.
“법무부 장관과도 이야기를 해봐야 할 거 같고 관련기관들과도 논
의를 해봐야겠지요. 아마 대통령도 반대 안하실 거 같은데요. 정부구
조조정작업이 끝나면 서서히 검토를 시작해야겠지요. 21세기에 여성
판검사들이 할당제를 통해 배출될 수 있으려면 도입시기는 2천년부
터가 좋지 않을까하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물론 구체적으로
검토된 건 아닙니다만 제 소신이 그렇다는 거에요”
-여성정책을 추진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으셨나요
“뭐 크게 어려운 점은 없었습니다. 다만 국무회의에 가서 상황이
달라지는 일들이 생길 때 난처한 경우는 있었어요. 군가산점 문제만
해도 제 입장은 좀 무리가 있지 않겠느냐는 쪽이었는데 언론에서는
잘못 보도가 됐더라구요. 마치 제가 적극 찬성한 것처럼 보도됐지만
사실 전 당시 국무회의에 참석도 못했어요. 차관을 대신 보내면서
이 문제에 대해 여성장관들의 견해를 들어보라고 했어요. 그런데 나
중에 확인해보니까 상황이 많이 틀리더라구요. 저는 군에 갔다는 이
유하나만으로 가산점을 너무 많이 준다는 생각이었거든요”
-장관님의 여성관이 궁금합니다. 무엇이 가장 큰 여성문제라고 생각
하십니까.
“아직도 여성에 대한 편견이 문제가 아닐까요. 아직도 남존여비사
상이 우리 사회에 남아있다고 생각합니다. 남자의 할일과 여자의 할
일이 따로 있다는 그런 생각 말이에요. 그런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많이 달라지고 있는 것 같아요. 제 주위 친구들만 봐도 나이들면서
마누라 눈치보고 살지 마누라에게 큰소리치는 사람은 없는 거 같더
라구요. 사실 나도 그렇고(웃음). 그리고 여성들이 스스로 한계를 만
드는 것도 문제라고 봐요. 여자들 스스로도 자기들 카테고리를 정해
가지고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구분하잖아요. 예를 들면 선거에
서 여성후보가 나오면 여성이 더 안찍는 거 같아요. 아직도 이런 선
입견과 사고가 굉장히 문제라고 봅니다”
-오랜기간 정치인으로 살아오셨는데요, 이제까지 추진해온 정책가운
데 가장 자랑할 만한 것은 무엇인가요.
“솔직히 자랑할 만한 건 별로 없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거라고 하
면 13대였던 걸로 생각드는데, 당시 가족법 개정할 때 우리당에서는
제가 소개 의원이 돼서 호주제 폐지안을 발의한 적이 있어요. 그때
만 해도 지금과 달라서 호주제 폐지 이야기만 나와도 반발이 셌거든
요. 하지만 뭐 크게 자랑할 만한 건 못 되고, 정말로 자랑할 만한 건
딸을 세명이나 낳았다는 겁니다(웃음). 딸이 셋이다 보니 여성들이
활개치는 세상이 더 빨리 왔으면 하는 것이 제 바람이 됐어요”
-상당히 가정적인 아버지이신가봐요. 가정에선 평등하신가요.
“평등하다기보다 오히려 제가 밀릴걸요(웃음). 전 아내를 모시고 살
아요. 사실 새벽같이 나가서 밤늦게 들어오는 일들이 많았기 때문에
평소 점수는 좋지 않아요. 하지만 휴일이나 명절때만 되면 아내와
아이들에게 봉사하면서 지냅니다. 평소에 진 빚을 갚는 거죠. 늦둥이
하고는 아파트 놀이터에서 놀기도 많이 해요. 주위 사람들은 꼬마하
고 할아버지라고 보기도 하지만요. 그리고 시간이 나면 아내와 함께
시장나들이도 합니다. 제가 운전해서 시장까지 태워주고 짐도 나르
죠. 또 영화구경도 자주 해요. 지난 추석엔 〈라이언 일병구하기〉를
봤어요. 솔직히 저는 잠을 자고 싶었지만 가족들이 원하니까 그대로
따르는 거죠. 뭐 이 정도면 저도 페미니스트 아닌가요”
'최진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