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로 시작된 광장의 정치가 잔디에 밀려 불법으로
자유로운 소통과 논쟁을 위한 열린 광장을 만들어야

10대 소녀들의 미국산 쇠고기 생명안전 문제제기로 촉발된 광장의 담론전쟁에 끝이 보이지 않는다.

주부들에 의한 먹거리 안전문제, 소비자에 의한 검역주권 문제, 시민들에 의한 반공공(反公共)적 정책문제, 누리꾼들에 의한 보수신문 문제, 종교인들에 의한 국민안전 문제, 정치인들에 의한 새 정부의 국정운영 문제 등이 모두 광장의 전쟁거리다.

정치의 주제도 다채로울 뿐 아니라, 촛불소녀, 유모차 주부, 성직자 등과 같이 정치의 주체도 우리에게 익숙한 정치꾼의 모습과 다르다. 또한 축제 속에서 논쟁하고 요구하는 정치의 실천방식도 기성 정치의 틀을 벗어나 있다.

전장(戰場)의 지평 너머로 ‘광장정치’가 떠오르고 있다. 이는 한국 정치에서 희망의 증후다. 

광장정치는 합의와 제도의 정치가 아니라 논쟁과 실험의 정치다. 광장 속에서는 그래서 기성 정치에 항거하는 새 정치 주체들의 다양한 목소리가 ‘새로운 정치’의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결정에 맞서 생명문제를 내세우는 ‘위험정치’, 먹거리 안전성을 강조하는 ‘생활정치’, 검역주권의 회복을 요구하는 ‘인정정치(politics of recognition)’, 주부의 눈높이를 강조하는 ‘성(gender)정치’, 미국과 대등한 관계를 바라는 ‘가치정치(politics of value)’가 그러하다.

이 실험은 새 정부의 정치적 논제를 둘러싼 다중의 복잡하고 중첩적인 의미 투쟁을 매개로 한다. 그래서 광장에는 현재 경찰 대 시위꾼, 보수 대 진보, 남성 대 여성, 기성세대 대 신세대, 네티즌 대 보수언론 사이의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이 싸움은 광장이란 공간이 유발하는 정치적 행위의 특이성이기도 하다.

서양문명의 뿌리라 불리는 ‘합리적 의사소통’, 그리고 이에 기반 한 민주주의는 그리스 광장을 기원으로 한다. 그리스의 광장은 ‘사람이 모인다’는 뜻을 가진 아고라였다. 아테네 시민들은 이곳에 모여 정치와 사상을 논쟁하고 사유하면서 야만인과 구별되는 문명인으로 살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을 정치적 동물로 불렀던 것은 바로 광장인을 전제로 한 것이다.

우리의 도시엔 진정한 광장이 없다. 그나마 모양을 갖춘 것이 있다면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일 것이다.

서울광장은 붉은악마들의 응원에 감명을 받은 이명박 전 시장이 ‘광장을 시민에게 돌려주겠다’는 약속으로 조성되었다. 그러나 약속과 달리 서울광장은 ‘사람 출입이 까다로운 잔디가 깔리고 관리 조례를 만들어 사람들의 이용이 관에 의해 규율되는 공용(公用)의 공간’으로 만들어졌다.

시민들의 자유로운 소통과 논쟁을 허용하는 공공(公共) 공간으로서 광장의 조건이 처음부터 결여되었다.

서울광장은 시민의 것이라기보다는 시청의 부속시설과 같은 것이다. 시로부터 허가를 받지 않는 집회는 불법일 수밖에 없다.

최근 서울시는 광장에 설치된 천막을 철거했고, 광장 출입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명분은 망가진 잔디 복원이다. 이는 서울광장의 주인이 시민이 아니라 잔디임을 간주하는 대목이다. 광장은 열려 있지만, 그 속엔 광장의 정체성을 억압하는 권력이 미만(彌滿)하고 있다는 뜻이다.

촛불로 밝혀진 광장에서 시민들은 국가권력에 의해 침해받고 있는 생명권, 생활권, 여성권, 참정권, 국민주권을 지키는 저항의 축제를 벌이고 있다. 그러나 광장에까지 침투한 다양한 얼굴의 지배 권력은 시민 권력의 주체들과 대화하고 소통하기보다 배제하고 탄압하는 힘을 끊임없이 행사하고 있다.

그래서 촛불시위로 밝혀진 광장은 ‘희망의 정치’를 여는 듯하지만 광장에 미만한 지배 권력은 우리에게 ‘좌절의 정치’를 여전히 강요하고 있다. ‘광장의 전쟁’은 이젠 진정한 광장을 얻기 위한 전쟁으로 옮겨가야 할 것 같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