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 파병군인 위한 ‘통조림 김치’ 첫 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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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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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월남전에서 고생하던 한국군을 위해 시레이션(통조림 음식)을 만들 때였다.

현기순 교수는 정부에 “군인들에게 최소한 이 정도의 영양은 섭취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며 군인 급식의 기준을 정하고 적극 권유했다. 군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백질이 보충된 식단이었다. 육류가 모자라면 멸치, 꽁치라도 공급을 늘려서 제대로 먹여야 했다.

“백번도 더 실패하고 나서 마침내 성공했지”

월남에 파병된 군인들의 먹거리를 위해 한국음식의 통조림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현 교수는 통조림 제조기술이 없던 한국에 대학 연구팀부터 만들었다. 중앙대, 명지대, 이화여대, 서울대 등에 재직하고 있는 가정학과 교수들이 이것에 공감하고 시레이션에 대한 연구를 함께 하기로 했다. 대학 공동연구팀이 신설되어 서울대에서 밤낮없이 연구를 했고, 연구결과를 토대로 수원 공장에서 시제품을 만들었다.

“김치를 깡통에 넣으면 김치가 아니라 김치찌개가 되는 거야. 그래서 김치를 통조림으로 제대로 만들기 위해 김치를 백번도 더 담갔어. 수십번도 더 실패하고 다시 하고 그러다가 마침내 제 맛이 나는 김치 시레이션을 만들 수 있었지. 캔에서 꺼내 먹을 수 있는 김치를 만든 순간 우리는 너무나 기쁘고 감격스러웠어. 그동안의 고생이 눈 녹듯 사라지고, 우리 군인들이 이제 배곯지 않겠구나 생각하니 뿌듯하고 눈물이 다 났어.”

현 교수는 김치통조림뿐 아니라 동료교수, 제자들과 실험을 거듭한 끝에 생선통조림, 멸치볶음통조림, 밥통조림을 만들기에 이른다. 멸치볶음 시레이션은 캔에 들어갈 멸치의 크기를 대략 정한 후 말리는 정도를 결정하고, 조미료 및 고춧가루의 양을 계량기구를 사용해 수치화했다. 수치화 작업은 대량생산에 더 없이 중요했다.

시레이션도 식단을 짜서 일주일 메뉴를 구성하고 한 캔으로도 충분한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도록 했다. 시레이션은 만들어지는 대로 월남으로 보내졌다. 느끼한 고기와 햄 덩어리 통조림을 먹던 파병 한국군들에게 한국식 시레이션은 대환영이었다. 월남에서도 김치를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고국에 대한 향수병을 줄이고 힘을 북돋워줬다.

월남에 보내진 시레이션은 보관장소가 마땅치 않아 주로 땅 속에 묻어 보관했다. 장병들은 흙더미가 약간 파헤쳐져 있든지 땅이 약간 봉긋해 있으면 상관들 몰래 땅을 파서 시레이션을 꺼내 먹기도 했다. 월남에서 고생하던 파병군인들은 마치 보물찾기를 하듯 땅을 파 시레이션을 찾기도 했고, 더러는 상관에게 들켜 혼이 났지만 시레이션 찾는 재미와 먹는 재미로 파병의 어려움을 덜 수 있었다는 일화를 만들었다.

“그렇게 고생해 큰 성과를 이룬 시레이션을 국내에서는 알아주지 않아 처음에는 섭섭했지.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니 애써 만든 시레이션이 전량 월남으로 보내졌기 때문인 것 같아. 한국에서는 시레이션을 구경도 할 수 없었으니 알아주지 않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르지만, 시레이션 연구팀은 정말 고생을 많이 했어. 어쨌든 우리 군인들이 밥을 제대로 먹을 수 있게 되었으니 그것만으로도 보람은 충분했지. 군인들이 잘 먹고 전쟁을 잘 치렀으니 그것으로 된 거야. 그런데도 뭔가 마음이 허전했어….”

젊은 날의 열정, 땀과 수고가 고스란히 밴 성과를 누군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이방자 여사 결혼 63주년 기념으로 궁중식 큰 상차림을 재현하고 있다.cialis coupon cialis coupon cialis coup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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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사·조리사 교육시켜 단체급식에 투입

월남전이 끝나면서 현 교수의 시레이션 작업도 끝났다. 이후 현 교수는 영양사와 조리사를 체계적으로 길러내기 위해 영양사와 조리사 교육을 시작했다. 그때부터 단체급식에는 영양사와 조리사가 꼭 참여하기 시작했다.(현 교수는 미국에서 영양사 자격증을 받고 영양사 인턴으로 일했었다.)

영양사는 식사 때마다 영양소의 필요량을 수치화해서 식단을 짠다. 메디컬센터에서 영양사로 일한 적이 있는 현 교수의 제자 홍성야 전 인하대 교수는 당시를 이렇게 전했다.

“그때 아마 제가 첫 영양사였을 거예요. 영양사라는 이름도 생소하던 때였지요. 병원에서 위장병 환자에게 고춧가루 국을 주던 때였으니까요. 영양사가 생소한 때이니 당연히 숫자도 부족해서 메디컬센터에 근무할 때 늘 야근을 했어요. 그럴 때마다 현 교수님이 격려하고 도움을 아끼지 않았죠. 한번은 미국인 경영자가 당시 돈 40만원을 주면서 파티를 열라고 했지요. 큰 돈인 데다가 파티를 어떻게 구성해야 할지 몰라서 현 교수님에게 자문을 구했는데, 돈에 맞게 예산을 짜고 메뉴를 구성하고 음식재료 구입 등 모든 것들을 너무나 체계적으로 해 지금 표현으로 하면 꼭 컴퓨터 같았다고나 할까요. 덕분에 저는 파티를 대성공으로 치러 칭찬을 받았지요.”

국내 처음으로 영양사와 조리사를 교육시켜 병원 등의 단체급식에 투입시킨 현 교수는 한국의 전통음식에 대해서도 수치화 작업을 하고 체계화하기 시작했다. 전통음식을 시대별로 나누고 평민, 귀족, 임금이 먹는 음식으로 구분한 후 3첩, 5첩, 7첩, 9첩, 11첩 반상을 만들었다. 수라상과 한식 연회음식도 조목별로 세분화하고, 연회음식도 여러 단계로 나누었다. 이런 내용들을 토대로 현 교수는 중·고교 교과서뿐 아니라 대학 교과서도 집필했다. 대부분의 가정학과 교과서는 그의 손을 거치고 그의 땀이 배었다.

조선조 마지막 왕세자비인 이방자 여사의 결혼 63주년 기념 궁중식 큰 상을 재현할 때도 현 교수는 어김없이 솜씨를 발휘했다. 창덕궁 낙선재에서 마련한 궁중식 큰 상에 현 교수는 전통음식 28가지를 선보여 대호평을 받았다. 이날 궁중식 큰 상 재현은 세계 전문직 여성 봉사단체인 존타클럽의 자선 바자와 겸해 열려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됐었다.

“퇴근하면 6명의 남자들이 날 기다리고 있었지”

왕성해진 사회활동과 더불어 현 교수의 가정에도 일대 변화가 생긴다. 46세 되던 해에 두번째 결혼을 했다. 남편은 대구가 고향으로 오랫동안 사업에 매진해온 아들만 넷을 둔 홀아비였다. 지인의 소개로 만남이 이뤄졌다. 처음 만났을 때 특별한 멋쟁이는 아니었지만 믿음이 갔고 아들이 넷이라고 했을 때 가슴에 무언가 꽉 박혀드는 것이 느껴졌다고 했다.

“어차피 내가 하는 사회활동이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고 남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하는 것이잖아. 혼자 사는 것보다 아이 있는 사람의 아이들을 잘 키우는 것도 보람되고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지. 아이들의 좋은 엄마가 될 각오로 결혼했어.”

현 교수다운 결정이었다. 당시 현 교수는 존타클럽의 초창기 멤버로 고아원을 돌보고 사회봉사를 실천하던 때였다. 고아원에 가면 아이들의 입가가 헐어 있기 예사였던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이들의 부르튼 입술을 보고는 입이 크려고 그런다면 주먹구구식으로 아이들을 위로했었다. 이때 현 교수는 영양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정확하게 진단하고, 고아원 원장에게 아이들에게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번데기를 먹이도록 권유해 아이들 입가의 병을 고치게 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많은 고아원들이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번데기로 아이들의 입술을 치료했다.

현 교수는 존타클럽 이전부터 전쟁으로 피폐해진 국토의 재건을 위해 1952년 설립된 한미재단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했다. 전쟁 후 넘쳐나는 고아들을 위해 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한미재단이 앞장선 고아원 돕기 활동에서 현 교수는 몸을 아끼지 않고 일했다. 교수로, 사회사업가로, 주부로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현 교수가 재혼할 당시 남편의 아이들은 큰아이가 대학 1학년, 둘째가 고등학생, 셋째가 중학생, 막내가 초등학생이었다. 남자만 5명인 집이었다. 남자 복이 갑자기 터진 현 교수에게 5명도 모자랐는지, 아내와 별거 중인 남편의 형도 한 집에서 살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결혼과 동시에 현 교수는 6명의 남자들과 한 식구가 되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6명의 남자들이 날 기다리고 있었지. 생각해봐. 먹을거리 장만하러 시장에 가면 한보따리를 사야 돼. 아무리 집안일을 도와주는 아주머니가 있다고 해도 거들고 도와야 할 집안일이 늘 태산이었어. 밖에서도 일, 안에서도 일, 그런 상황이었지.”

자신이 낳은 자식을 키우는 데도 우여곡절이 있게 마련인데, 머리 다 굵어서 자식이 된 아이들과 어찌 섭섭한 일이 없었을까. 초등생이던 막내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는 힘든 숙제를 끝낸 것 같은 감동이 밀려들더라고 현 교수는 덧붙였다. 늦게 시작한 결혼생활과 무르익은 사회활동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었다.

학교에서 MT를 가게 되면 남편도 따라 갔다. 현 교수의 남편은 후배들이나 학생들과도 잘 어울렸다. 남편은 틈만 나면 현 교수의 동료나 제자들과 함께 어울렸다. 4명의 아들들은 다 대학을 졸업하고 가정을 꾸렸다. 현 교수는 아들들을 한명씩 홀로서기를 시키면서 엄마 노릇을 그럭저럭 다한 것 같았다고 했다. 다들 제 몫을 하면서 살고 있다.

미국의 양어머니 식구들이 한국에 오던 날은 현 교수에게 손자·손녀가 생겼던 때였다. 양어머니는 현 교수가 미국 유학시절 돈이 없어 크리스마스 선물을 장만하지 못해 고민하다가 옷감으로 가지고 있던 강화명주를 잘라 수를 놓아 스카프를 만들어준 일을 두고두고 기억했다. 양어머니 식구들과 현 교수 가족은 서울에서 소중한 시간을 함께 보냈고, 이후에도 서로 왕래하면서 안부를 묻고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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