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로해 준 글쓰기가 독자들에게도 위로가 되길"
'친절한 복희씨'는 출간하자마자 인터넷서점 예스24의 종합 베스트셀러 7위(10월25일 기준)를 기록하는 등 독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그는 1970년 마흔 나이에 늦은 데뷔를 한 이후 지금까지 평단과 독자들로부터 한결같은 사랑을 받아온 여성문학계의 큰 별이다.
아차산 자락의 아치울 마을(경기도 구리시 아천동)에서 80세를 목전에 두고도 여전히 꺼지지 않는 창작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 박완서 작가를 지난 24일 전화로 만났다.
"사람 사는 이야기가 다 소설이지"
"그저 고단할 뿐이지 뭐. 인터뷰 요청도 많은데 모두 거절하고 있어요. 그래도 일주일에 서너번은 서울에 나와요. 사람들도 만나고, 극장에 가서 영화도 보고."
새 책의 반응이 뜨거운 만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는 그래도 글 쓰는 일이 있으니 다행이란다. "글 쓰는 일만큼은 늘 나를 새롭게 만들어요. 그때 그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글을 썼죠. 이 나이에도 먹고 살려면 일이 있어야 하잖아요"라며 웃었다.
그는 '작가의 말'에서도 "이 짓(글쓰기)이라도 안하면 이 지루한 일상을 어찌 견디랴. 웃을 일이 없어서 내가 나를 웃기려고 쓴 것들이 대부분이다. 나를 위로해준 것들이 독자들에게도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고 쓴 바 있다.
자전소설이었던 데뷔작 '나목'에서부터 그의 작품들은 자신과 주변사람들의 삶 속에서 글감을 찾아온 것으로 유명하다. 이른바 '생활밀착형 글쓰기'라고 불리는 그의 소설들은 우리네 삶에서 한번쯤은 보고 겪었을 법한 이야기들로 독자들에게 가깝게 다가온다. 긴 세월 동안 한결같은 사랑을 받아온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경험하지 않은 건 못써요. 사람 사는 이야기가 다 소설 아니겠어요."
그런 작품 경향은 새 소설집에서도 계속된다. 2001년 발표해 제1회 황순원문학상을 수상한 '그리움을 위하여'는 소설에서처럼 실제로 사량도 어부와 결혼해 살고 있는 그의 사촌동생 이야기다. '그래도 해피엔드'는 작가가 동네에서 버스를 타고 서울로 나가다가 뒷문으로 타는 바람에 기사와 승객들에게 질타를 받은 경험을 소재로 삼았다.
'그 남자의 집'은 예전에 발표했던 같은 제목의 장편의 모태가 된 작품. 50년 전 사라진 사랑의 흔적을 더듬어가는 주인공의 회상에는 6·25전쟁 직후 폐허의 시기에 청춘을 보낸 작가의 경험이 녹아 있다. 이전 작품들 속에서도 꾸준히 다뤘던 이 시기의 풍경들이 여기서도 펼쳐진다.
이번 작품들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특징은 대부분 황혼에 접어든 노인들을 화자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암, 중풍, 노인성 치매, 관절염, 잦은 건망증 등 각종 병에 시달리며 노년을 보내고 있는 그들의 평범한 일상을 치밀한 구성력과 거침없는 문장으로 그려낸다.
노인들을 전면에 내세운 데 대해 그는 "지금까지 노인들은 소설 속에서 스쳐가는 단역으로 등장하며 '타자화'되었다. 그러나 노인들의 삶에도 나름의 재미가 있음을 얘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표제작인 '친절한 복희씨'는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서울 와서 처음 취직한 가게의 주인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애 딸린 홀아비인 그에게 시집가 한평생을 보내야 했던 노인이 주인공이다. 남편이 화장실 뒤처리를 해주는 자신의 손길에 성적 흥분을 느끼는 것을 보고는 서둘러 비데를 설치하고 "세상에 그런 편리한 장치가 있다는 걸 당신은 아마 상상도 못했을 걸. 용용 죽겠지"라며 소소한 복수를 한다. 급기야 남편이 비아그라를 사려 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치욕감과 소름을 느낀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서 제목을 따왔다는 이 작품은 지난해 문인 100명이 선정한 '가장 좋은 소설'로 뽑히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의 인생을 망친 남자에게 결국 총을 쏘는 금자와 달리 복희는 일상에서 탈출하지 못한다.
"영화도 봤죠. 하지만 내용을 참고하거나 한 건 아니에요. 굳이 말하자면 복희의 복수는 금자보다는 '친절한 복수'라고나 할까. 복희의 그 후 이야기? 그런 건 독자에게 맡겨야지요."
'대범한 밥상'은 남편을 췌장암으로 잃고 자신 역시 암 선고를 받아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노인이 전하는 여고 동창 경실의 이야기다. 주인공과 경실이 나누는 장장 17페이지짜리 대화를 읽다보면 그 표현이 너무도 생생해 금방이라도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고 싶은 심정이 된다.
이번 소설집의 노인 화자들 속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감정은 '그리움'이다.
"그립다는 느낌은 축복이다. 그동안 아무것도 그리워하지 않았다. 그럴 것 없이 살았으므로 내 마음이 얼마나 메말랐는지도 느끼지 못했다."('그리움을 위하여', 40페이지)
"마지막 창작집은 아니겠지요"
박완서 작품의 또 다른 특징인 인간의 위선에 대한 풍자,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여성주의적 의식 등은 이번 소설집에서도 여전히 살아있다. 그러나 예전보다는 그 강도가 다소 누그러진 느낌이다.
'마흔 아홉 살'의 주인공은 '효부회'를 결성해 무의탁 노인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지만 시부모에게는 정반대로 대하는 주부. 그러나 자신의 본 모습을 알아버린 사람들의 비난에 항의도 부인도 하지 않는다.
"난 왜 이렇게 겉 다르고 속 다를까.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서부터 가짜인지 나도 모르겠는 거 있지"라고 말하는 주인공. 그리고 "모든 인간관계 속엔 위선이 불가피하게 개입하게 돼 있어. 꼭 필요한 윤활유야"라는 친구에게 "위로해줘서 고맙다"고 한다.('마흔 아홉 살', 105, 107페이지)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 허위의식을 까발리면서도 이를 '필요악'이라고 말하는 부분. 작가는 "나이가 드니 현명해지기도 하고 관대해지는 것 같다"는 말로 설명했다.
그는 작가의 말에서 "9년 만에 또 창작집을 내면서 또 작가의 말을 쓰려니 할 말이 궁했던지 문득 이게 마지막 창작집이 될 것 같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고 쓴 바 있다. "마지막 창작집이라고 했다가 내년에 또 내게 되면 계면쩍잖아요"라며 웃는 그는 일단 올해 말까지는 휴식을 취할 계획이란다.
김점선 화가의 그림으로 꾸며진 표지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작가가 '활기 넘치는 표지'라고 표현하기도 한 표지는 김점선 특유의 색감으로 마치 동화책을 보는 듯한 즐거움을 준다. 박씨가 직접 표지 그림을 청했더니 흔쾌히 응해주었다고. 두 사람은 사는 곳도 가까워서 가끔 만나는 편이다.
박완서 작가는 여성신문과의 인연도 남다르다. 대표작 중 하나인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는 1989년 여성신문에 연재됐던 작품. 지난해 900호 특집호에서도 여성신문 독자에게 보내는 글을 실었고, 수필가로 데뷔한 딸 호원숙씨의 칼럼도 연재된 바 있다. 여성신문이 19주년을 맞았다고 하자 그는 "내년이면 벌써 20주년이네. 스무살이면 어른이네"라며 뿌듯해했다.
1931년 경기도 개풍 출생. 1950년 서울대 국문과 재학 중 한국전쟁 발발로 학업을 중단했다. 1970년 여성동아 여류소설 공모에 '나목'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한국문학작가상(1980), 이상문학상(1981), 이산문학상(1991), 현대문학상(1993), 동인문학상(1994), 대산문학상(1997), 만해문학상(1999), 황순원문학상(2001) 등 주요 문학상을 두루 수상했다.
작품집으로 '엄마의 말뚝', '저문 날의 삽화', '너무도 쓸쓸한 당신' 등. 장편소설로 '살아있는 날의 시작',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서있는 여자',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아주 오래된 농담' 등이 있다. 그 외 다수의 산문집과 동화책을 출간했다.